•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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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 제대로 보존된 왕가는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던 곳이자 고종이 태어난 집이다. 이처럼 왕족들이 살던 집을 ‘궁’이라 했는데 현대인들에게 알려진 ‘궁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궁가’는 일제침략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이 사라졌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공공건물이나 주택, 고층건물이 들어서 집터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문화관광해설가인 이순자 씨는 “그의 책 ‘조선의 숨겨진 궁가이야기’에서 세조의 잠저였던 영희전에는 서울 중부경찰서가, 인조와 효종의 잠저인 어의궁에는 피카디리극장이, 선조와 인빈 김씨의 소생 정원군이 살고 인빈 김씨의 사당이었던 저경궁에는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이 들어섰다”고 밝혔다.
 
이렇게 2011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1800년대의 ‘궁가’를 보는 일은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 관리하는 경우가 아니면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얼마 전 팸투어를 통해 ‘조선왕가’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었다. 눈으로 보기만 한 게 아니라 직접 왕가에서 숙박까지 하며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가'의 아주 특별한 여행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조선왕가’의 History와 Spirit
‘조선왕가’의 이름은 ‘염근당(念芹堂)’. 고종황제의 영손(令孫)으로 조선조 역대 왕의 종묘제례(宗廟祭禮)를 관정하였던 황족 이근(李芹)의 고택이었다. ‘염근당’은 1800년대에 창건되고 1935년에 99칸으로 중수(重修)된 황실가(皇室家)의 전통 한옥이다.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3가 51번지에 위치했던 ‘염근당’은 남권희 이사장(이학박사)에 의해 현재의 주소지인 경기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 420-1로 옮겨 오게 된 것이다.
 
“성균관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우연히 이 고택을 발견했는데 첫 눈에 범상치 않은 집임을 알았어요.”
 
남권희 이사장은 당시 대학으로부터 ‘염근당’을 구입한 후 2008년 6월 15일부터 약 5개월에 걸쳐 기와, 대들보, 서까래, 기둥, 주춧돌, 기단석, 토방돌 등 트럭 약 300대 분량을 현 위치인 자은산 기슭으로 옮겼다.
 
27개월에 걸쳐 본래의 그 자재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보수해 마침내 지난해 9월 7일 중건하였다. 후원(後園)의 자은정(紫恩亭)은 명륜동에 있을 당시 고 박 정희 전 대통령께서 사용하던 정자이기도 하다.
 
남 이사장은 “이 염근당과 자은정을 이건(移建)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 중 대들보에서 붉은 비단에 싸여진 상량문과 함께 금(金) 셋, 은(銀) 다섯, 동(銅) 일곱 덩어리 등이 나왔다”고 밝혔다.
 
창건 당시 상량문은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무정(茂亭) 정만조(鄭萬調) 선생이 짓고, 당대의 명필(名筆) 농천(農泉) 이병희(李丙熙) 선생이 글씨를 쓴 것으로 확인됐다. 이 한옥을 이전 복원하는 역사(役事)에는 무형문화재 도편수(都片手) 최명렬 선생과 무형문화재 와공(瓦工) 이도경 선생이 직접 참여해 이뤄졌다. 복원공사는 조선조의 전통왕가 건축양식을 전혀 훼손하지 않으면서 벽체와 바닥은 황토를 사용했다.
 
“"一華石必使愼守芬擇永存" 이 글은 대제학 정만조 선생이 쓰셨던 조선왕가 염근당의 상량문 맨 끝 문장입니다. '꽃 한 송이 돌 하나라도 반드시 신중하게 지키시어 아름답고 향기로운 은택이 영원히 보존되게 하여 주소서'라는 뜻으로 이는 자연 친화와 환경보존의 중요성을 이미 알았던 조상들이 그런 정신으로 왕가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 왕가를 자은산 기슭에 이건하여 정말로 꽃 한 송이, 돌 하나도 신중하게 지키는 마음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역사 속에 왕가를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남권희 이사장은 조선왕가를 발견한 이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이끌려 고택을 매입하고 수개월의 작업 끝에 연천으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염근당 이건 당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기둥에 붙이는 주련(柱聯)이 성균관대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던 것을 알고 몇 달에 걸쳐 총장님을 설득했어요. 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롫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역사의 보존성을 강조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자고 말씀드렸고 총장님도 결국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렇게해서 모든 주련들이 지금의 염근당 기둥에 온전히 붙어 있게 된 것입니다.”
 
조선왕가'의 자연과학 사상
조선왕가에는 현대식 호텔이 흉내내지 못하는 특별한 과학이 숨어 있다. 바로 ‘자연합일’과 ‘자연회귀’라는 우리 조상들이 남겨 준 위대한 자연과 생활과학이다.
  
황토방-왕실의 비전으로 꼽히는 양명술에는 뒷날 세상사람들을 구하는데 황토가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특히 온천을 개발하여 눈병 등을 치료했던 세종, 세조 임금은 황토를 민간에 알리게 했으며, 왕과 왕자들이 피로할 때 쉴 수 있도록 3평 정도의 황토방을 궁내에 만들어 피로회복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창문-조선왕가는 환경 호로몬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나무와 돌, 황토 흙으로만 만든 조선전통한옥이다. 소나무 원목으로 된 창문은 겨울과 여름을 위해 신축. 팽창을 통해서 문틈이 생겨 겨울에는 외풍이 있지만 이는 두한족온(頭寒足溫)으로 우리 몸의 화강수승(化降水乘)의 자연법칙에 의한 기와 혈이 잘 순환하게 한 선조들의 슬기로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전통한지-또한 닥나무로 만든 전통한지는 그 섬유조직 안에 미세한 기공을 지니고 있어서 공기를 통과 시키고 빛을 투과시켜 우리 몸에 가장 이로운 세로토닌과 토파민 등 생리활성 물질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그래서 한옥생활을 한 사람이 감기 등에도 면역력이 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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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외출 ‘조선왕가’ 한옥 여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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