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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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따스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어서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자연을 가슴에 품고, 온 몸으로 느끼며 오롯이 나만을 생각하며 걷기에 가장 좋은계절, 가을이다. 가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푸른 산의 섬, 느림의 섬, 청산도에 갔다. 

청산도 슬로길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지역, 그로 인해 느림의 대명사로 떠오른 청산도에 '슬로길' 이라는 걷기 좋은 코스가 지금 한창 개발 중이다. 현재까지 기존에 있던 길을 재정비하여 총 21km, 6개의 코스가 완성이 되어 있고, 향후 마라톤 완주 코스와 똑같은 길이인 42.195km를 목표로 슬로길을 개척할 예정이다.

   
청산도 슬로길 걷기 코스

그 6개의 코스 중 네 번째 코스인 '범길' 과 두 번째 코스인 '연애바탕길'을 걸어 보았다.

범길은 권덕리 에서 시작해 범바위 까지 이르는 총 1.8km의 길로, 길이는 비교적 짧지만 범바위 까지 오르는 길이 산으로 오르는 길이라 결코 만만치는 않은 길이다. 하지만 범바위에 올라서면 청산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아주 좋은 길이기도 하다. 범길의 종착점인 '범바위'는 호랑이가 바위를 향해 포효한 소리가 자신의 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오자 자신보다 더 큰 호랑이가 있는 줄 알고 섬 밖으로 도망쳤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다. 혹자는 그 바위가 호랑이가 무서워 도망간 바위니 범바위가 아니라 '곶감바위'가 됐어야 하지 않느냐는 우스개소리를 하기도 했다. 범바위에선 강력한 자성이 흘러 근처를 항해하는 배의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아 신비의 바위로 불리기도 한단다.

 

   
범길의 중간 코스인 말탄바위에서 올려다본 범바위. 완만해 보이지만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오르막이 계속 이어진다.

   
범길 중간코스에서 내려다본 길과 범길 정상에 있는 전망대. 범바위는 이 전망대가 내려다 보이는 맞은편에 우뚝 솟아있다.

연애바탕길은 당리에서 구장리로 이동할 때 걸어 다녔던 해안 절벽 길로 남녀가 길을 걸으면 험한 길을 걷는 사이 새록새록 정이 붙어 연애의 바탕이 된다하여 붙여진 재미있는 이름이다. 실제 그 길을 걸어 보았으나 그리 험한 구간은 없고, 호젓한 분위기로 인하여 남녀간에 연애의 감정이 생길 수도 있는 길이라 생각 되었다.

연애바탕길의 초입엔 청산도의 상징인 '초분' 모형이 있어, 초분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산교육을 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연애바탕길을 걷는 중에 만난 '도둑게'가 인상적이었다. 같이 걷던 일행이 발견하여 여러 사람의 흥미를 자아낸 이 녀석은 원래 바다에서 사는 게가 아니다. 섬에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그때서야 바다로 나아가 알을 털어 놓고 다시 올라오는 특이한 습성을 가진 게이다. 바닷가가 아닌 해안가 길에서 발견된 이유이다.

 

   
호젓하지만 다소 험한 코스인 연애바탕길. 길에서 만난 '도둑게'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서편제길 과 돌담길

드라마 '봄의 왈츠' 셋트장이 멀리 보이는 돌담길이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유명한 서편제길이다. 봄엔 유채와 청보리밭으로 그 화사함을 빛내던 길이 가을로 접어든 지금은 코스모스의 울긋불긋한 색깔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본 당리마을의 포구 모습은 청산도의 대표적인 모습이 됐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 되었다. 움푹 파인 해변과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논밭의 모습이 다정하다. 아쉬운게 있다면 벌써 추수가 끝난 논이 약간은 썰렁해 보인다는 것이다.

   
당리마을 언덕에서 내려다본 포구의 모습.  지금은 밀물때라 포구 깊숙히 물이 들어와 있지만 썰물이 되면 바닥에 설치되어 있는 '독살'이 모습을 드러낸다.
 

   
봄이면 유채꽃과 청보리가 만발하는 서편제길. 지금은 화려한 색깔의 코스모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청산도의 또 하나의 대표 격 이라 할 수 있는 상서마을 돌담길은 오로지 돌로만 쌓은 담장이 특색이다. 담장위에서 자연스레 자라고 있는 수세미, 동아, 호박 등의 모습을 보니 잠시 과거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되는 회색빛 도시에서의 시간이 이곳에선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는 듯 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뒤로 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살면 세월도 천천히 흘러 나이도 천천히 먹는건 아닐까...

   
상서마을의 돌담길
 

초분

지난해 방영 되었던 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청산도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 방송 중에 ,길에서 멀지 않은 밭 가운데 놓여있는 초분 앞에서 서럽게 울고 계시는 아주머니를 뵈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의 눈물 이었으리라.. 내가 직접 본 초분이 그분의 그 초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청산도에 몇 남지 않은 초분이니 그분의 초분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남쪽의 섬 몇 군데만 남아 있는 이 장례문화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하지만 조상을 모시는 일이라 그리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듯하니 이곳 청산도 에서만이라도 그 문화가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청산도에 몇 남지 않은 실제 초분중의 하나

*초분

말 그대로 풀무덤으로 산사람과 죽은 사람이 같이 공존하는 섬지역의 장례 풍습이다. 시신 또는 관을 땅이나 판석위에 올려놓은 뒤, 바람을 막기 위해 풀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육탈이 되고 남은 뼈를 추려 땅에 묻는다. 초분을 쓰는 이유는, 청산도 에서는 음력 정월과 2월에 땅을 들추면 해를 입는다고 해서 그런 풍습이 생겼다고도 하며 또 다른 이유로는 상주가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갑자기 상을 당했을 때 임시로 거치해 두기 위함이기도 하고, 죽은 즉시 묻는 것이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 될 때, 또는 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해서 시신을 땅에 바로 넣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한다.

 

구들장 논

 

   
이름도 정겨운 청산도 구들장 논

푸른 산의 섬 청산도는 섬이지만, 주변 어장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주민의 9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하지만 청산도의 땅은 거칠고 험한 곳이 많은 편이라 좁은 경작지를 늘이기 위해 산록과 산중턱까지 개간을 해야 했다. 그래서 계단식 논을 만들었지만 자갈이 많은 땅은 물을 가둬두지 못하고 흘러내려 버려 고안해 낸 것이 구들장 논 이다.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넓고 평평한 돌을 놓아 위에 흙을 깔아 논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청산도를 여행하다 곳곳에 보이는 유연한 곡선의 구들장 논은 여행객들의 눈엔 그저 아름다운 광경으로 보일뿐이지만, 그곳에서 논을 일구는 이들의 눈물과 땀이 베여있는 곳이다.

 

청산도의 일몰

'일생을 살면서 일출과 일몰을 많이 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좀 뜬금없는 말이다 싶기도 하지만 일출과 일몰을 많이 본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쉼표 내지는 여유로움의 시간을 많이 가진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난 요새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2박 3일간의 여행 동안 한 번의 일출과 두 번의 일몰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일몰을 말이다. 청산도 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지리 해수욕장이다. 고운 모래와 백사장 뒤의 해송이 일품인 지리 해수욕장은 바닷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완만하여 가족단위의 여행객들이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곳이기도 하다.

 

   
지리 해수욕장의 일몰. 고운 모래위에 바다와 낙조가 그려놓은 그림이 아름답다.

늘 만족하며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앞만 내다보고 거침없이 살아온 삶을 잠시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이 필요할 때이다. 나의 부족함을 걱정하고 닿을 수 없는 이상에 욕심을 품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아 보면 어떨까. 이곳 청산도 에서는 그런 삶이 가능할 것만 같다. 느림의 섬, 기다림의 섬. 느림과 기다림은 결코 뒤쳐짐이 아니다. 永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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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걸어서 청산도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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