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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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이동을 하게 된 곳은 바로 북안면 도유리에 위치한 광릉이다.
 
광릉이라 당연하게 왕릉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특이하게도 이곳은 왕의 무덤이 아닌 광주이씨의 시조묘라고 한다. 그런데도 왕에게만 붙을 법한 ‘~릉’ 이라는 명칭과 함께 광주이씨의 묘가 이곳 경북 영천까지 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기만 하다.
 
 
 
   
광주이씨의 광릉을 찾아 가는 길의 풍경은 정말 멋지기만 하다. 특히나 맑게 갠 파란 하늘아래 소나무는 왠지 오래 전 의 시대로 돌아가는 듯한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경운기는 분명 현대를 살아가는 농기구임이 분명함임에도 이 오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속에서 이질감 없이 세월의 흔적과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적 매개체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광주이씨가 머나먼 이곳 까지 오게 되었을까? 
 
고려말 신돈의 득세로로 권문세족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치며, 혼란스러운 세상에 당시 영천최씨(최원도)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으로 오게 된다. 얼마 후 최원도와 신임이 두텁던 이집 또한 신돈을 비판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화가 닥칠 것이라 예상한 이집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친구 최원도를 찾아 영천으로 내려온다. 몇 개월 만에 만난 두 친구 하지만 그날은 최원도의 생일이라 찬치가 벌어지고 있었고 왠일인지 최원도는 이집 부자를 밖으로 쫒아 내고 말아버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광주이씨와 영천최씨 사이에 내려오는 설화가 있다.
 
친구가 짐심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이집은 밤이 되도록 기다려 다시 최원도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게 된다. 최원도는 멸문의 화를 피하기 위해서 잠시 이집을 쫒아냈던 것 처럼 한 것이다. 이후 4년간 다락방에 이집 부자를 숨겨 지낼 수 있게 해주었으나 결국 최원도 집 내의 가족과 몸종까지도 이 일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지화를 입을까 몸종은 결국 목숨을 끊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원도는 애처로워하며,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고 자신의 어머니의 묘 부근에 묻어 준다. 얼마 후 이집 부친 또한 운명을 달리 하자 주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자신의 어머니의 묘 부근을 내어 주어 지금의 광릉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광주이씨와 영천최시의 후손은 이집과 최원도의 우의를 상기 하면서 양가가 같을 날 묘제를 지내는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둔촌에게 드린다.
 
(사간 최원도)
 
강개하게 시국을 한탄하여 눈물로 옷깃 적셨는데
유리중에도 지극한 효성은 유음까지 달했노라.
한산은 멀고 멀어 운연만 아득한데
나현은 굽이굽이 돌아 초수도 그윽하구나
앞뒤의 그대와 나 두사람의 마음을 알것인가.
바라건데 대대로 길이 이와 같이하여
모름지기 교정이 이단금 토록 하자구나.
 
   
 
 
 
이 광릉을 보고 있자면, 몇 백년을 거슬러 올라서부터 이어지는 끈끈한 우정을 볼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곳 에 들어오는 길에서부터 느껴졌던 무엇이 과연 그것일까? 나에게는 이런 우정이 있었으려나 삶을 되집어 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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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광주이씨 시조묘, 광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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