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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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복잡하거나 무료할 때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울 신문로2가에 위치한 경희궁에 가 보자.  경희궁 앞 서울역사박물관 정원 길에는 여름 꽃이 활짝 피어 있다. 그 길을 따라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지나면  경희궁도 완연한 여름을 만날 수 있다.   나무 벤치에는 더위를 식히고 있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금천교를 지나기전 잔디 밭에도 초록 풀들과 나무가 방문객에게 시원함을 주었다. 돌다리인 금천교를 지나 숭정전 문으로 들어갔다.  숭정전을 둘러보고 자정전 뒷쪽으로 향했다. 뒷쪽에는 뜰이 있었는데, 왕이 이곳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뜰에는 이름 모를 작은 여름 꽃들이 피어 있었다.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경희궁은 연회를 했던 장소라서 그런지 왕과 왕비, 그리고 신하들이 무희의 춤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떠올랐다.
 
경희궁은 사적 271호로 지정된 조선후기의 이궁이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하였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을 대부분 헐었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해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서울시에서는 1987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들어서면 궁내의 전각에 들어서기 전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진 돌다리가 보인다. 난간의 돌짐승들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상징성을 띠는 것이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다.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 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희궁 터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이용한 시설들도 많이 있었는데, 현재는 서암과 영렬천만이 그 흔적을 말해준다.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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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궁' 이야기 '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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