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고창의 청보리밭에서는 바람이 먼저 보인다. 초록의 이삭들이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바람은 저 멀리서 출발해 발끝까지 밀려오고, 머문 자리에 조용히 연둣빛 안부를 남긴다.
멀리 청보리밭과 맞닿은 하늘에 흰 구름 몇 조각이 느긋하게 떠 있다. 그 사이로 드러난 파랑이 유난히 맑다. 언덕 위 나무들은 서로의 그늘을 침범하지 않을 만큼 떨어져 서 있다. 먼 길을 함께 왔으나 굳이 말을 건네지 않는 동행처럼, 나란히 제 자리를 지킨다.
여행을 떠날 때면 무엇을 보고 돌아올지부터 생각했다. 그런데 이 밭 앞에서는 다음이라는 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이삭 끝에 얹힌 햇빛을 보다가, 다시 바람이 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릴 뿐이다.
청보리는 같은 초록으로 빛나지 않는다. 볕을 받은 곳은 노랗게 환하고, 그늘진 곳은 깊고 서늘하다. 멀리서는 한 덩어리였던 들판이 오래 바라볼수록 수많은 빛으로 나뉜다. 서둘러 지나갔다면 보지 못했을 색들이다.
카메라를 들었다가 잠시 내린다. 사진 한 장에 담기는 것은 눈앞의 풍경이지만, 이곳에서 가져가고 싶은 것은 조금 다르다. 바람을 기다리는 동안 느슨해진 어깨, 아무 말 없이 길어진 숨, 얼마쯤 잊고 있었던 나의 느린 걸음이다.
돌아갈 시간은 온다. 들판은 여전히 출렁이고 구름은 언덕 너머로 흘러간다. 떠나기 전 한 번 더 뒤를 돌아본다.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자리에도 바람이 지나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문득 그 초록이 떠오를 것 같다. 하루가 버겁게 기우는 저녁이면, 청보리가 몸을 일으키던 속도로 나도 천천히 고개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최치선의 포토에세이]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https://hodabgpnhciikfrpzais.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article-photos/legacy-live/212bab2cf6f1186fb2bdfa80c8fa905d4db2ad08.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