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한라산이 타오르듯 붉게 물들고 애월의 억새밭이 바람을 따라 눈부신 은빛 파도를 일으키는 계절, 제주의 가을이 가장 깊고 차분한 모습을 드러낸다. 구좌의 넓은 밭에서는 주황빛 당근이 꽉 찬 단맛을 익혀가고, 섬 곳곳의 미술관과 고즈넉한 마을길에는 풍성한 문화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남들보다 빠르게 관광지를 스쳐 지나가는 대신, 제주의 아늑한 자연과 정겨운 마을에 오래 머물며 계절의 깊이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진짜 '제철 제주' 여행이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단풍(제공=제주관광공사)
가을 한라산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화려한 단풍의 경쾌한 스펙트럼을 선사한다. 웅장한 기암절벽과 붉은 단풍이 한데 어우러지는 영실~윗세오름 구간부터 아늑한 단풍과 일렁이는 억새를 동시에 만나는 어리목~윗세오름 코스까지 다채롭다. 부담 없이 가볍게 걷고 싶다면 어승생악이, 백록담 정상을 품에 안고 싶다면 성판악이나 관음사 코스가 제격이다. 알록달록한 한라산 단풍은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에 절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단, 정상 탐방은 사전 예약이 필수이며, 9월과 10월에는 낮 12시 30분부터 입산이 제한되는 구간이 있으므로 부지런히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편이 좋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신창풍차해안도로와 법환~강정해안도로가 더없이 완벽한 코스다. 신창에서는 이국적인 풍차와 탁 트인 차귀도를 바라보며 페달을 밝을 수 있고, 법환에서 강정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에서는 푸른 범섬과 정겨운 서귀포 바다를 곁에 두고 달린다. 기분 좋은 가을바람 속에서 바다와 소박한 시골 마을을 느긋하게 연결하는 최고의 드라이브이자 라이딩 길이다.
입안 가득 번지는 가을의 풍미는 구좌 당근이 든든하게 책임진다. 척박한 화산회토와 거친 해안 바람을 견디며 자란 구좌 당근은 특유의 아삭아삭한 식감과 독보적인 단맛을 자랑한다. 구좌읍 일대의 감성적인 카페에서는 진하게 짠 당근 주스와 달콤한 당근케이크 등 입을 즐겁게 하는 다양한 디저트를 내놓는다. 본격적인 당근 수확은 11월 말부터 시작되며, 송당리와 평대리 일대 농가에서는 직접 농작물을 밭에서 솎아보는 재미있는 수확 체험도 함께 운영해 여행에 즐거움을 더한다.
계절의 흐름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소박한 마을 여행도 일품이다. 9월에는 호젓한 저지오름과 신비로운 곶자왈, 미술관이 길을 잇는 저지리가 마음을 사로잡고, 10월에는 뛰노는 제주마와 억새길이 펼쳐지는 가시리와 의귀리가 여행객을 반긴다. 11월에 들어서면 탐스러운 노란 감귤밭과 울창한 삼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는 신례리가 제주의 정취를 더해준다.
진정한 조용한 쉼과 휴식을 고대한다면 물영아리오름이 오롯이 기다리고 있다. 넓은 목장 초지에서 울창한 삼나무 숲을 지나 신비로운 분화구 습지까지 약 40분이면 가볍게 닿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람사르습지 동백동산을 비롯해 상효원, 생각하는정원 역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웰니스 명상 여행지로 큰 기대를 모은다. 애월읍 어음리와 큰사슴이오름에는 흐드러진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조천읍 와흘리에는 10월 초 하얀 메밀꽃이 소금처럼 뿌려진다. 섭지코지와 우도에서는 뜨거운 여름이 지나간 한적한 해안을 여유롭게 거닐 수 있다.
당근쥬스(제공=제주관광공사)
풍성하게 펼쳐지는 문화 예술 행사도 놓칠 수 없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가 11월 15일까지 제주도립미술관과 제주돌문화공원, 원도심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져 섬 전체를 예술의 물결로 채운다.
10월에는 제주의 대표 축제인 탐라문화제를 비롯해 서귀포칠십리축제, 제주마축제 등이 연이어 개최되어 풍성한 볼거리를 더한다. 도내 공식 관광 정보 포털 비짓제주는 29일부터 10월 19일까지 '제주 가을 사진 이벤트'를 가동해, 여행 중 촬영한 풍경이나 축제 사진을 등록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푸짐한 경품을 증정한다.
가을의제주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이동하는 것보다 천천히 거니는 '속도'가 훨씬 중요한 선물 같은 여행지다. 높고 푸른 오름을 가만히 오르고, 나지막한 마을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싱싱한 제철 음식 앞에서 기분 좋게 멈춰 서는 일이야말로 오직 이 계절, 지금의 제주에서만 누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호사스러운 휴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