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서동휘 기자] 칸이 주목한 영화의 첫 문장은 속초에서 시작됐다. 나홍진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 ‘호프’의 시나리오를 2018년 여름 속초에서 완성하고, 대포항에서 제작 가능성을 처음 논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속초가 ‘창작의 도시’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나 감독은 최근 공개된 인터뷰에서 속초에 머물며 ‘호프’를 집필했다고 밝혔다. 원고를 마친 뒤에는 시각특수효과 회사 대표를 대포항으로 불러 작품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을지 의견을 나눴다. 어선이 오가고 상인과 여행객이 뒤섞이는 항구에서 세계적인 대작의 첫 제작 논의가 이뤄진 셈이다.
‘호프’는 영화 ‘곡성’ 이후 10년 만에 선보인 나 감독의 신작이다. 외딴 항구마을에서 시작되는 낯선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올해 제79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며 세계 영화계의 관심을 끌었다.
속초가 영화인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는 영랑호 범바위가 가상의 공간 ‘구소산 기름봉’으로 등장했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서면 잔잔한 영랑호와 설악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동해까지 시야가 열려 영화 속 긴장감과는 또 다른 시원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코야 카무라 감독의 장편 ‘속초에서의 겨울’은 도시 이름을 제목에 내걸었다. 겨울 바다와 항구, 전통시장과 오래된 골목을 따라가며 경계에 선 인물의 감정을 담아냈다. 설악·금강대교 역시 드라마 촬영지로 등장해 청초호와 도심의 밤을 잇는 속초의 야경을 알렸다.
스크린 여행은 영랑호에서 시작해 속초관광수산시장과 청초호, 설악·금강대교, 대포항으로 이어가기 좋다. 낮에는 호수와 바다를 걷고, 해가 진 뒤에는 불빛이 번지는 교량과 항구를 바라보며 영화 속 장면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설악산과 동해, 두 개의 호수와 생활 골목이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점이 속초만의 힘이다.
속초는 2024년 12월 대한민국 문화도시로 최종 지정된 뒤 음식과 사람, 도시의 기억을 문화콘텐츠로 확장하고 있다. 관광지를 빠르게 둘러보는 여행에서 벗어나 시장과 골목에 머물며 각자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도시로 방향을 넓히는 중이다.
이병선 속초시장은 “세계가 주목하는 작품의 이야기가 속초에서 시작되고 도시 곳곳이 영화와 드라마의 무대로 선택된 것은 속초의 풍경과 일상이 창작자에게 특별한 영감을 준다는 의미”라며 “자연을 즐기는 관광지를 넘어 저마다의 감성과 이야기를 발견하는 문화도시로 알려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속초의 바다와 호수는 같은 자리에 머물지만 계절과 빛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그 변화가 영화인에게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되고, 여행자에게는 오래 남는 장면이 된다. 이번 여름에는 유명 명소만 찍고 돌아서기보다 영화의 첫 문장이 태어난 대포항과 스크린에 담긴 범바위를 천천히 걸어볼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