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칼끝으로 파낸 나무판 위에 세계의 풍경과 사람의 기억이 새겨진다. 제14회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이 22일부터 8월 2일까지 울산문화예술회관 제1∼4전시장에서 열려 한여름 울산을 거대한 판화 미술관으로 바꾼다.
울산제일일보가 주최하고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에는 국내외 10개국 작가 124명이 참여한다. 전통적인 목판화의 깊은 질감부터 동시대 작가들이 확장한 실험적인 표현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목판화는 나무판을 칼로 파내고 그 위에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예술이다. 한 번 새긴 판으로 여러 장을 찍을 수 있지
만, 칼이 지나간 방향과 작가의 힘, 나무결에 따라 작품의 표정은 전혀 달라진다. 빠르게 소비되는 디지털 이미지와 달리 한 선을 남기기 위해 오랜 시간 나무와 마주해야 한다는 점도 목판화만의 매력이다.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은 해마다 세계 각국의 작가를 울산으로 불러들이며 목판화 단일 장르의 국제 교류 무대로 성장해 왔다. 산업도시 울산의 강한 인상과 나무판을 파고드는 칼의 힘도 묘하게 닮았다. 검은 면과 흰 여백이 맞부딪치는 작품 사이를 걷다 보면 노동과 도시,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서로 다른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공식 개막식은 24일 오후 5시 울산문화예술회관 제1전시장에서 열린다. 이에 앞서 같은 날 오후 1시에는 국내외 목판화의 역사와 흐름을 살펴보는 학술세미나가 마련된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는 ‘망명과 가명의 세월’을 주제로 독일 판화가 카를 메페르의 삶과 작품세계를 들려준다. 메페르는 나치 정권을 피해 망명한 뒤 ‘클레망 모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사회의 억압과 인간의 고통을 강렬한 판화에 새긴 작가다. 작품 뒤에 가려진 망명과 저항의 시간이 세미나를 통해 다시 조명된다.
중국미술학원 판화학과 차이첸지 교수는 ‘원류는 깊고 흐름은 길다’를 주제로 중국미술학원 목판화의 전통과 정신적 계보를 소개한다. 기법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한 세대의 작업이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동아시아 목판화가 시대 변화에 어떤 방식으로 응답했는지를 살펴보는 자리다.
작품을 눈으로만 감상하는 전시에서도 벗어난다. 스탬프 아트와 목판화 제작 등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체험행사가 24∼26일과 8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어린이와 가족 관람객도 나무판의 촉감과 잉크 냄새, 종이에 그림이 찍히는 순간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다.
목판에 새겨진 선은 거칠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열 나라 작가들이 칼끝으로 기록한 시대와 삶, 자연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목판화가 낡은 기법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언어라는 사실을 만나게 된다. 이번 여름 울산에서는 한 장의 판화 앞에 천천히 멈춰 설 이유가 생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