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남원 시내에서 여원재를 넘어 운봉고원으로 들어서자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해발 500m 안팎의 고원지대답게 한여름 볕 아래에서도 바람 끝이 서늘했다. 운봉주조의 문을 열자 쌀이 익는 구수한 냄새와 발효 중인 술의 새콤한 향이 겹쳐 밀려왔다. 반듯하게 늘어선 탱크와 세척 설비 사이로 최봉호 대표가 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술도가의 기억과 현대식 생산시설이 한 공간에서 나란히 숨 쉬고 있었다.
지리산 운봉주조는 1979년 1대 최규창 대표가 세운 뒤 아들 최봉호 대표가 가업을 이어온 운봉읍의 장수 양조장이다. 지역민의 잔칫상과 저녁 밥상을 지켜온 시간이 47년에 이르렀고, 2025년에는 오랜 신뢰와 장인정신을 인정받아 백년가게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찾아가는 양조장’에도 선정돼 술을 생산하는 공장을 넘어 우리술을 보고, 듣고, 맛보는 여행 공간으로 영역을 넓혔다.
“막걸리는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하지만 기본 맛과 품질은 흔들리면 안 됩니다.”
운봉주조의 출발점은 물과 쌀이다. 지하 200m에서 끌어올린 암반수와 백미를 기본으로 삼고 발효 온도와 시간을 세밀하게 관리한다. 예전에는 주인의 감각에 기대던 공정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동화 설비와 품질관리 시스템으로 일정한 술맛을 지켜낸다. 최근에는 생산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스마트팩토리까지 도입해 전통의 손맛을 수치와 기록으로 축적하고 있다.
시음대에 놓인 술은 같은 막걸리이면서도 표정이 달랐다. ‘지리산 정담 막걸리’는 백미 100%로 빚은 알코올 도수 6도의 탁주다. 쌀의 담백한 향이 먼저 올라오고 부드러운 단맛과 산미가 크게 튀지 않는다. 목 넘김이 편안해 전이나 나물, 돼지고기 수육처럼 담백하거나 기름진 음식에 두루 어울린다
‘지리산 운봉막걸리’는 첫맛이 깔끔하고 뒷맛이 짧다. 단맛이 오래 남지 않아 입안이 무겁지 않고 운봉고원의 맑은 공기를 닮은 청량한 인상이 살아 있다. 산이 좋아 구름도 쉬어간다는 운봉의 풍경처럼 단정한 술이다.
운봉주조의 이름을 널리 알린 ‘지리산 허브잎술’은 로즈마리와 라벤더를 넣어 빚은 특허 막걸리다. 2011년과 2014년 대한민국 우리술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병을 가볍게 흔들어 잔에 따르면 구수한 쌀 향 사이로 로즈마리의 솔잎 같은 향과 라벤더의 쑥을 닮은 향이 은근하게 번진다. 향이 술맛을 덮지 않고 목을 넘긴 뒤에도 산뜻한 여운을 남긴다.
최 대표는 허브가 막걸리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는 비율을 찾기 위해 1년 넘게 배합과 침출 방식을 바꿔가며 시험했다.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내지 않고 이웃과 친구, 애주가들을 불러 맛을 보게 했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 “됐다”는 말이 나올 때에야 제품으로 내놓았다. 두 차례 우리술품평회 대상은 그렇게 쌓인 시간의 결과였다.
효자상품인 ‘야관문 쌀 막걸리’는 백미에 야관문으로 불리는 비수리를 더한 알코올 도수 6도의 특허 막걸리다. 이름이 주는 강한 인상과 달리 맛은 거칠지 않았다. 쌀에서 오는 은근한 단맛 뒤로 풀 향과 옅은 쌉싸래함이 따라오며 입안을 정리했다.
“술을 어렵게 설명하기보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최 대표는 허브 막걸리에 적용했던 연구 방식을 야관문에도 이어갔다. 익숙한 막걸리에 야관문의 이야기를 입히자 소비자들은 이름을 기억했고, 술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됐다. 야관문 막걸리는 운봉주조의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동시에 양조장의 대표 상품으로 성장했다.
‘지리산 정담 동동주’는 밥알이 동동 떠 있는 모습부터 옛 술상을 떠올리게 한다. 잘 익은 밥알이 혀끝에 닿으며 일반 막걸리보다 씹는 재미와 포만감을 더하고 쌀의 고소함도 길게 이어진다. 정담은 부드럽고, 운봉은 깔끔하며, 허브잎술은 향긋하다. 야관문은 쌉싸래한 여운이 있고, 동동주는 쌀알의 질감이 살아 있었다. 같은 물과 쌀에서 출발했지만 잔마다 운봉의 다른 얼굴이 담겼다.
체험관에서는 막걸리가 익어가는 과정을 살펴보고 술 빚기와 시음을 경험할 수 있다. 발효 탱크 안에서 술이 숨 쉬는 소리를 듣고 잔마다 다른 맛을 비교하다 보면 한 병의 막걸리가 물과 쌀, 효모, 고원의 기후와 사람의 기다림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이 보인다.
최 대표가 지금 가장 오래 바라보는 곳은 해외시장이다. 생막걸리는 병 안에서도 발효가 계속되기 때문에 낮은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유통기한이 짧고 운송 중 압력 변화도 살펴야 한다. 냉장 컨테이너와 물류비 부담까지 더해지면 작은 양조장이 완제품을 먼 나라로 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가 새로운 해법으로 꺼낸 것이 ‘파우더 막걸리 밀키트’다. 막걸리 원료와 발효에 필요한 재료를 가루 형태로 담아 운반하고, 소비자는 집에서 물을 붓고 흔든 뒤 일정 시간 발효시켜 직접 막걸리를 완성한다. 무거운 병과 액체를 운반하지 않아도 되고 냉장 유통 부담도 줄일 수 있다.
외국 소비자에게는 완성된 술 한 병을 사 마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쌀과 누룩이 술로 변하는 과정을 기다리며 한국의 발효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상품이 된다. 운봉주조가 세계시장에 내보내려는 것은 막걸리만이 아니라 ‘내 손으로 우리술을 빚는 시간’인 셈이다.
운봉주조의 미래에는 3대가 있다. 현재 학생인 최 대표의 아들은 앞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켜온 술도가를 이어갈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5년 뒤 아들이 양조장에 본격적으로 합류한다면 아버지의 기술과 경험에 젊은 세대의 감각, 온라인 유통과 해외시장에 대한 이해가 더해질 수 있다.
최 대표의 머릿속에서는 술에 대한 아이디어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운봉주조를 상징하는 반달가슴곰 디자인을 비롯해 제품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로고도 모두 그의 구상에서 출발했다. 지리산을 대표하는 반달가슴곰을 친근한 이미지로 풀어내고, 술마다 다른 이야기와 표정을 입히는 일까지 직접 고민했다. 한 병의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인이면서 동시에 운봉주조의 얼굴과 이야기를 설계하는 기획자인 셈이다.
“아이디어는 계속 나옵니다. 운봉에서 만든 막걸리를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알리고, 더 멀리 보낼 수 있을지를 늘 생각합니다.”
양조장 밖으로 나오자 운봉 들녘 위로 늦은 오후 햇빛이 내려앉았다. 1대가 술도가의 문을 열고, 2대 최봉호 대표가 허브와 야관문, 반달가슴곰 캐릭터와 막걸리 밀키트로 운봉주조의 영역을 넓혔다면, 다음은 3대가 세계의 문을 두드릴 차례다. 운봉의 작은 잔에서 시작된 K-막걸리가 국경을 넘어 각 나라의 식탁에서 다시 발효되는 미래가 최 대표의 끊이지 않는 아이디어 속에서 조금씩 익어가고 있었다.

![[우리술 여행]최봉호 대표…운봉주조 3대가 빚는 K-막걸리](https://hodabgpnhciikfrpzais.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article-photos/legacy-live/8d983c6056b7ceb4fd56db19405c5f4e0aadc1ab.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