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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00년 넘은 제주 조천포의 화려한 반전

관문 연북정·조천진성 야간 조명 옷 입었다

함덕 찍고 밤바다 보며 걷는 '역사 산책길'

서동휘 기자
100년 넘은 제주 조천포의 화려한 반전

[트래블아이=서동휘 기자] 조선시대 육지를 향한 유배인들의 그리움과 눈물이 짙게 배어 있던 제주 조천포의 밤길이 화려한 빛의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난다. 뭍으로 향하는 관문이자 제주의 슬픈 역사를 묵묵히 지켜봐 왔던 연북정과 조천진성이 야간경관 조명을 전격 설치하고 새로운 밤바다 문화유산 산책 명소로 탈바꿈한다. 그동안 낮 시간에만 잠시 들러 스쳐 지나가던 오래된 포구의 풍경이 어둠을 밝히는 은은한 조명과 만나면서, 제주 동쪽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밤의 낭만을 선사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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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북정 야간 경관 상상도 (제공=제주도)

이번 프로젝트는 제주도 세계유산본부가 도지정 문화유산인 연북정과 조천진성 주변에 세련된 야간경관 조명 시설을 대대적으로 설치하는 '연북정·조천진성 야간경관 개선사업'을 이달 중으로 전격 마무리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한밤중만 되면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통행이 조심스러웠던 이 일대의 보행 환경을 안전하게 개선하는 것은 물론, 훌륭한 문화유산이 가진 역사적 가치와 수려한 밤 경관을 관광 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가 담겼다.

 

조천포는 과거 제주 동북부 해안을 단단히 지키던 가장 핵심적인 관문이었다. 화북포와 더불어 조선시대 제주와 육지를 끈끈하게 연결하던 최대 규모의 주요 포구로, 섬에서 자란 제주마를 비롯해 임금님 상에 오르던 감귤과 전복 같은 귀한 진상품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 한양으로 향했다. 거친 바다를 건너 제주로 부임해 오던 목사와 관리들도 가장 먼저 조천포를 통해 제주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오늘날의 여행자들에게는 그저 한적하고 조용한 해안가 시골 마을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곳은 오랜 세월 제주의 눈물과 환희가 바깥세상과 격렬하게 만났던 첫 번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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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조천조점' (제공=제주도)

그 역사의 중심에서 도도하게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연북정이다. 타원형의 웅장한 조천진성 위에 고고하게 자리 잡은 이 정자는 조선시대 제주로 유배를 온 수많은 선비와 관리들이 북쪽 한양 하늘을 바라보며 임금의 은전을 기다리고, 두고 온 가족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는 애틋한 스토리텔링을 품고 있다. 이름에 담긴 뜻 그대로 '북쪽의 임금을 사모한다'는 처절한 외로움이 녹아 있는 공간이다. 푸른 바다를 멍하니 응시하는 정자의 쓸쓸한 시선에는 제주 섬사람들의 거친 삶과 유배인들의 깊은 한, 그리고 국경 관문으로서의 팽팽한 긴장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정자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조천진성 역시 제주 방어의 핵심이자 군사적, 해상 교통의 흔적을 생생하게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다. 돌을 깎아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곽과 드넓은 포구, 운치 있는 정자가 한데 어우러진 비경은 조선시대 제주의 살아있는 풍경을 세밀하게 기록한 화첩 '탐라순력도' 속 '조천조점'이라는 그림에도 생생하게 등장한다. 수백 년 전 그림 속에 박제되어 있던 옛 관문의 장면이 현대적인 감각의 야간경관 조명과 조우하면서, 이제 조천포는 박물관 속 유적지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숨결을 동시에 느끼며 걷는 매혹적인 밤 산책길로 완벽하게 부활했다.

 

특히 이번 조명 설치 작업은 눈을 피로하게 만드는 인위적이고 과도한 연출을 철저히 배제하고, 전통 문화유산 고유의 아름다운 윤곽과 선을 자연스럽게 살리는 데 방점을 찍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성곽의 곡선과 정자의 고풍스러운 기와지붕, 그리고 포구의 잔잔한 어둠과 시원한 밤바람이 빛의 미학으로 어우러지면서 낮과는 전혀 다른 신비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밤에도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안전한 보행 환경을 제공하고, 제주를 찾은 관광객들에게는 동쪽 야간 관광의 새로운 킬러 콘텐츠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최근 제주의 야간 관광 트렌드는 단순히 실내에 머무는 것을 넘어 시원한 폭포 야경, 화려한 미디어아트, 낭만적인 천문 관측과 해변 밤 산책을 중심으로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이번 연북정과 조천진성의 야간경관은 이러한 트렌드에 '역사 문화유산'이라는 묵직하고 깊이 있는 감성을 더해 차별화를 꾀했다. 인근의 유명 관광지인 함덕해수욕장과 조천 일대를 찾은 여행자들이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고즈넉한 조천포로 발걸음을 옮기면, 제주의 밤은 단순한 휴식을 넘어 타임머신을 타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조우하는 특별한 시간으로 격상된다.

 

제주도는 이번 개선사업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신호탄 삼아, 도내에 산재한 다양한 문화유산별 고유 특성을 고스란히 살린 맞춤형 야간경관 사업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문화유산을 그저 훼손되지 않게 꽁꽁 싸매고 보존하는 소극적인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민들의 일상과 여행자들의 발길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만끽할 수 있도록 실용적으로 활용하겠다는 패러다임의 변화다.

 

제주의 낭만적인 밤은 비단 푸른 바다의 파도 소리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검은 성곽의 돌 틈 사이로 따스한 빛이 스며들고, 정자 기둥 너머로 포구의 아련한 밤바람이 살아 숨 쉴 때 섬의 위대한 역사는 여행자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조천포가 선보이는 새로운 야간경관은 눈을 자극하는 화려한 불빛쇼보다 훨씬 더 깊고 진한 시간의 궤적을 보여준다. 그동안 제주를 낮에만 부지런히 돌아보고 밤이 되면 숙소로 가기 바빴던 여행자라면, 이제 달빛 가득한 조천의 밤 성곽길을 반드시 걸어봐야 할 명백한 이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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