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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한지에 새긴 경전, 정선 산골에 걸리다

김홍기 법사 설위설경 초대전, 푸른별이야기 예술창고서 9월 15일까지

최치선 기자
한지에 새긴 경전, 정선 산골에 걸리다

[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강원 정선의 산길 끝, 나무 냄새가 배어 있는 작은 전시공간에 흰 한지의 경전이 걸렸다. 검은 바탕 위로 꽃과 별, 문과 그물이 번져 나간다. 가까이 다가서면 붓질이 아니라 칼끝으로 도려낸 흔적이다. 전통한지공예명인이자 법사로 활동해온 김홍기 씨의 설위설경이 푸른별이야기 예술창고에서 조용한 장엄을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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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진공예 작품 설위설경 전시가 정선 푸른별이야기 예술창고에서 열리고 있다. 예술창고 앞 김홍기 법사(사진=최치선 기자)

‘전통한지공예명인 김홍기 법사 초대전-설위설경’은 정선군 정선읍 덕산기길에 자리한 푸른별이야기 예술창고에서 6월 26일 개막해 9월 15일까지 이어진다. 전시 제목은 ‘천지의 언어-경전을 한지에 펼치다’다. 입구에는 푸른빛 포스터가 걸렸고, 안으로 들어서면 목재 벽과 따뜻한 조명 아래 흰 설경들이 숨을 고른다. 전시장 한쪽에는 더블베이스 한 대가 세워져 있고, 창밖으로는 정선 산골의 짙은 숲빛이 밀려든다.

 

이번 전시는 푸른별이야기의 주인장 최일순 감독이 기획하고 주관했다. 그는 배우이자 로드무비 <소풍>을 연출한 감독이며, 세계일주를 마친 여행가이자 여행작가다. 지금은 정선에서 게스트하우스 푸른별이야기를 운영하며, 자신이 직접 만든 전시공간 푸른별이야기 예술창고를 지역 문화의 작은 무대로 가꾸고 있다. 여행자의 숙소였던 공간이 이번에는 설위설경을 품은 산촌 갤러리가 됐다.

 

설위설경은 단순한 한지공예가 아니다. 충청권 앉은굿에서 법사가 경문을 독송하기 전 굿청에 설치하던 종이 무구에서 비롯됐다. ‘설위’는 자리를 베푼다는 뜻이고, ‘설경’은 경을 말하거나 펼친다는 뜻을 품는다. 한지를 접고 자르고 도려낸 문양은 신령과 인간, 산 자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를 잇는 상징물로 세워졌다. 법사가 북과 징을 치며 경을 읽는 무속 의례의 공간에서 설경은 장식이 아니라 기도이자 경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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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위설경 전시공간 푸른별이야기 예술창고 ( 사진,=최일순 감독, 구성=트래블아이)

김홍기 법사는 청양에서 전해 내려오는 사귀착수굿의 전승자다. 사귀착수굿은 귀신과 악령을 물리치고 마을과 사람의 평안을 비는 앉은굿 계열의 종합 의례다. 사귀착수굿보존회는 지난해 10월 문화체육관광부와 경북도 등이 함께한 한국민속예술제에서 일반부 전승상을 받으며 전통 민속의 생명력을 다시 알렸다.


이번 전시에는 이십팔수설경, 팔문금사진설경, 육화진설경, 오행진설경, 철망설경, 시행신장설경, 팔보살설경, 나비진설경, 문간진설경, 연화대설경 등 18점이 소개된다. 별자리와 방위, 신장과 문, 연꽃과 나비가 한지의 빈틈 속에서 살아난다. 칼로 덜어낸 자리는 비어 있지만, 그 비어 있음 속에서 오히려 경전의 숨결이 선명해진다.

 

김홍기 법사는 작품 앞에서 한참 말을 고른 뒤 “경을 읽는 일은 보이지 않는 아픔을 듣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억울하게 떠난 넋과 남은 사람의 슬픔을 달래고 싶어 한지를 잡았다”며 “설위설경은 칼로 오려낸 문양이 아니라 원혼을 위로하고 산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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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법사와 설위설경 작품들(사진=최치선 기자) /트래블아이

최일순 감독은 김홍기 법사의 설위설경을 “한지공예명인으로서 오랫동안 이어온 작업이자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들은 신령과 인간, 산 자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를 잇는 상징물이며, 김홍기 법사가 직접 경을 독송하면서 원혼을 위로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위설경은 무속의 세계와 깊이 맞닿아 있다. 병과 재액을 막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달래며, 억울한 죽음과 남은 이의 슬픔을 위로하려는 정서가 그 안에 흐른다. 전라도 씻김굿처럼 망자의 한을 풀어 저승길을 닦는 의례와는 계통이 다르지만, 원혼을 위무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루만지는 마음은 서로 닿아 있다. 종이는 가볍지만, 그 위에 실린 기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정선의 나무벽과 한지의 흰 결, 첼로의 곡선과 산골의 고요가 만나면서 전시는 오래된 굿청의 장엄과 현대 갤러리의 정적을 동시에 품는다. 김홍기 법사의 칼끝은 종이를 자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잊혀가는 전통의 언어를 오늘의 눈앞으로 불러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한 장의 한지 위에 조용히 세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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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법사의 설위설경 작품(사진=최치선 기자) /트래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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