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서동휘 기자] 접속하는 순간, 세계의 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 문 너머에서 기다리는 것은 연결의 기쁨이 아니라 고립의 심연이다. J-호러의 기념비적 걸작으로 꼽히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회로>가 개봉 25주년을 맞아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돌아온다.
<회로>는 기괴한 웹사이트를 발견한 ‘료스케’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미치’가 세계의 붕괴와 마주하는 세기말 호러 스릴러다. 어느 날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낯선 메시지, 붉은 테이프로 봉인된 방, 사라지는 사람들, 점점 텅 비어가는 도시가 영화의 공기를 지배한다. 공포는 피와 비명으로 밀려오지 않는다. 대신 복도 끝의 그림자처럼 천천히 다가와 관객의 등 뒤에 오래 남는다.
2001년 공개된 이 작품은 인터넷 보급 초기의 불안과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일본 사회에 번진 무력감을 동시에 붙잡았다. 모두가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인간을 더 깊은 고독으로 밀어 넣는다는 역설은 당시에는 예언처럼 보였고, 지금은 일상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스마트폰과 SNS로 하루 종일 타인과 접속하면서도 외로움을 견디는 오늘의 관객에게 <회로>는 낡은 공포가 아니라 현재형의 경고가 된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큐어>, <절규>와 함께 <회로>를 통해 자신만의 공포 문법을 완성했다. 점프스케어에 기대지 않고, 인물을 멀찍이 세워둔 채 공간과 침묵, 느린 움직임만으로 불안을 증폭시킨다. 카메라는 설명하지 않고 지켜본다. 관객은 사건의 중심에 뛰어드는 대신, 아무것도 막을 수 없는 목격자가 된다. 그 무력감이야말로 <회로>가 가진 가장 차가운 힘이다.
작품성도 일찍이 인정받았다. <회로>는 제54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고, 국제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제34회 시체스 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는 호세 루이스 구아네르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이후 할리우드 리메이크 <펄스>로도 이어지며 디지털 공포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4K 리마스터링은 영화가 품고 있던 어둠의 결을 더 선명하게 되살린다. 회색빛 도시, 오래된 모니터의 차가운 빛, 벽에 번지는 얼룩 같은 그림자가 극장 스크린에서 다시 숨을 쉰다. 화질은 선명해졌지만 공포는 오히려 더 낡고 깊어졌다. 25년 전 인터넷의 유령은 이제 관객의 손안에 있는 화면과 더 가까워졌다.

![[영화 회로] 인터넷의 유령이 돌아온다](https://hodabgpnhciikfrpzais.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article-photos/a438aebc-3290-4b98-9a15-89446bc86831/00-legacy-cover-1432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