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경주 황남동 골목의 시간은 늘 천천히 흐른다. 그 느린 숨결 위에 이번에는 한지가 내려앉았다. 손끝으로 뜨고, 말리고, 물들이며 완성한 우리 종이의 결이 행정복지센터 작은 갤러리 안에서 오래된 경주의 빛과 만난다.
경주시 황남동행정복지센터가 6월 1일부터 29일까지 행복갤러리에서 아정 엄창희 작가의 전시 ‘한지에 머문 시간’을 연다. 전시는 전통 한지가 지닌 고요한 깊이와 현대적 조형미를 함께 보여주는 자리다. 그림과 공예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은 한지 특유의 질감과 색감을 살려 일상 속 예술의 온기를 전한다.
황남동 행복갤러리는 주민들이 행정업무를 보러 오가며 자연스럽게 예술을 만나는 생활문화 공간이다. 황리단길과 대릉원, 첨성대가 가까운 황남동의 특성상 주민뿐 아니라 경주를 찾은 여행객도 잠시 걸음을 멈추기 좋다. 거창한 미술관이 아니어서 오히려 편하다. 문턱 낮은 공간에 걸린 작품들은 경주의 오래된 골목처럼 조용히 관람객을 맞는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한지다. 한지는 얇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재료다. 빛을 품으면 부드럽고, 겹을 이루면 깊어진다. 엄 작가는 그 성질을 살려 전통 공예의 단아함과 생활 속 쓰임을 함께 풀어냈다. 한지 그림은 물론 실생활 가구와 어우러진 작품들도 선보여, 우리 종이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생활 가까이에 놓일 수 있는 예술임을 보여준다.
작품마다 색은 과하지 않고, 결은 서두르지 않는다. 한지 위에 번진 빛과 무늬는 오랜 손작업의 시간을 품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면 종이의 섬유질이 살아나고, 조금 물러서면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 전통이라는 말이 낡은 형식으로 머물지 않고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피어나는 순간이다.
엄창희 작가는 “이번 전시는 전통 소재인 한지가 그림과 공예품뿐 아니라 실생활 가구와도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담았다”며 “많은 분들이 일상 속에서 피어나는 우리 종이 한지의 멋과 따뜻함을 느껴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길남 황남동장은 “아름답고 우아한 한지 그림과 작품들로 행복갤러리를 채워준 엄창희 작가에게 감사드린다”며 “경주시민과 관람객들이 한지가 가진 고전적 아름다움과 현대적 예술성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경주 여행은 유적지만 보고 끝나지 않는다. 대릉원 돌담길을 걷고, 황리단길의 소란을 지나, 작은 갤러리에서 한지의 결을 마주하는 시간도 경주답다. 오래된 도시의 하루 끝에 우리 종이 한 장이 남기는 따뜻한 여운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