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어떤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떤 아이에게 집은 가장 먼저 벗어나고 싶은 장소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폭력과 상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깊은 여운을 남긴 영화 ‘현재를 위하여’가 관객들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김다솜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현재를 위하여’는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 살아가는 소녀 현재와 10년 전 실종된 딸을 잃은 여성 해인의 만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자극적인 사건보다 인물들의 내면과 감정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삶을 조용히 응시한다.
영화는 가정폭력이라는 무거운 현실을 소재로 삼지만 비극을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과 흔들림,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작은 희망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의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들의 눈빛이다.
김다솜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출신으로 단편영화 ‘알로하’,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통해 인간관계와 결핍의 감정을 꾸준히 탐구해왔다. 첫 장편인 이번 작품에서도 감독 특유의 시선은 더욱 깊고 단단해졌다.
영화의 시작은 의외로 작은 질문에서 출발했다. 과자 봉지 뒷면에 인쇄된 실종아동 사진을 차마 오래 바라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감독은 그 순간의 감정을 따라가다 실종된 아이의 가족보다 집을 떠나고 싶어 하는 소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탄생한 인물이 바로 현재다.
현재 역은 신예 배우 황보운이 맡았다. 거칠고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소녀의 복합적인 감정을 밀도 있게 표현했다.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자유로운 현재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장면으로 남는다.
현재에게 노래는 탈출구다. 폭력과 두려움이 가득한 일상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주는 마지막 공간이다. 자전거를 타고 여름 길을 달리는 장면과 햇살 아래 노래하는 순간은 현재가 꿈꾸는 다른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채정안은 10년 전 실종된 딸을 잃고 살아가는 해인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긴다. 화원을 운영하며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실이 남아 있다. 식물을 돌보는 손끝과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이 배어 있다.
특히 해인과 현재의 관계는 이 영화의 핵심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구원하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결핍을 비추며 흔들리는 존재들에 가깝다. 현재는 해인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찾고, 해인은 현재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을 마주한다.
배민수가 연기한 목경 역시 중요한 인물이다. 현재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친구로 등장해 영화에 또 다른 감정의 결을 만든다. 함께 집 밖 세상을 꿈꾸지만 결국 각자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청춘의 현실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최근 한국 독립영화계에서는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질문하는 작품들이 주목받고 있다. 혈연이 아닌 관계 속에서 위안을 찾고,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들이 관객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현재를 위하여’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장 섬세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부문에 초청돼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이 작품은 상영 직후 관객들 사이에서 깊은 여운을 남겼다. 거대한 사건보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영화의 힘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현재를 위하여’는 폭력에 관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희망에 관한 영화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하는 순간, 삶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영화는 거창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지금 당신은 어떤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