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5월 22일 오후, 종로구 청운요양원 강당에 노래와 박수가 번졌다. ‘동행 ISMB와 함께하는 경로잔치 한마당’ 무대에 선 김민 회장과 늘푸른샘공연예술단은 어르신 50여 명에게 익숙한 가요와 민요, 색소폰 연주로 따뜻한 한 시간을 선물했다.
무대 중앙에는 시각장애 코미디언 김민 회장이 섰다. 그는 아주 작은 틈으로 명암과 사물의 형체만 흐릿하게 구분한다. 선명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객석의 숨소리와 박수의 결은 누구보다 예민하게 읽는다. 익숙한 노래가 흐르면 성대모사를 섞고, 어르신들이 웃기 시작하면 짧은 농담을 건넸다. 그의 말끝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피어났다.
김 회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공연 전날 비가 많이 내려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공연 당일에는 날씨가 화창해 기분 좋게 무대를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궂은비가 지나간 뒤 열린 봄날의 공연은 오랜만에 어르신들을 만나는 늘푸른샘공연예술단에게도 더없이 반가운 시간이었다.
김 회장은 자신을 “공연하는 자원봉사자”라고 말한다. 그에게 봉사는 행사가 아니라 마음을 다해 찾아가는 일이다. 무대가 작다고 마음까지 작아질 수는 없다. 그는 “어르신들께 드리는 공연인데 대충할 수는 없다.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김민 회장은 1980년 TBC 동양방송 공채 개그맨 2기로 데뷔했다. 김형곤, 장두석, 이성미 등과 같은 시기를 통과한 방송인이다. 군 복무 중에도 문선대에서 수백 차례 무대에 섰고, 제대 뒤 개그맨 선발대회 방송을 듣고 도전해 본선 3등에 올랐다. 고졸 출신으로 당당히 합격한 그는 데뷔 직후 라디오 프로그램 고정 패널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방송 환경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동양방송이 한국방송으로 흡수되면서 일거리가 줄었고, 그는 방송국 무대 대신 밤무대와 지역 행사장을 오가며 생계를 이어갔다. 동기들이 브라운관에서 이름을 알리는 동안, 그는 현실의 무대에서 버텼다. 웃기는 일이 직업이었지만, 삶은 늘 웃을 수만은 없었다.
2001년, 더 큰 고비가 찾아왔다. 당뇨 합병증이 그의 눈을 서서히 가렸다. 백내장과 녹내장이 겹치며 시야는 흐려졌고, 지금은 아주 작은 틈으로 명암과 사물의 형체만 희미하게 구분한다. 선명한 풍경은 사라졌지만, 그는 흐릿한 시야 너머에서 다시 사람을 만났다.
병원 문을 나선 어느 날, 김 회장은 종로 탑골공원을 걸었다. 눈앞은 흐렸지만 어르신들의 기척은 들렸다. 그는 박하사탕 몇 봉지를 사서 나눠주고 성대모사를 시작했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손뼉을 쳤다. 그 순간 그는 다시 살아 있다는 감각을 얻었다. 누군가를 웃기는 일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 작은 웃음이 늘푸른샘공연예술단의 씨앗이 됐다. 김 회장은 대학가요제 출신 김호평 씨, 전자오르간 연주자 강길성 씨 등과 함께 양로원과 복지시설을 찾기 시작했다. 과자와 빵, 생필품을 들고 가 노래하고 웃겼다. 어르신들은 그들을 ‘아들 3형제’라 불렀다. 그렇게 이어진 봉사의 시간은 어느덧 20년을 넘어섰다.
이날 청운요양원 무대도 그 마음의 연장선이었다. 김민 회장은 외삼촌인 가수 고복수의 ‘짝사랑’을 불렀다. 이어 이경란 경기민요 전수자가 ‘신고산타령’과 ‘궁초댕기’로 흥을 돋웠고, 박영국 가수는 ‘사랑이 메아리칠 때’를 불렀다. 윤기숙 사회복지사는 알토색소폰으로 ‘내 마음 별과 같이’와 ‘청포도 사랑’을 연주해 박수를 받았다.
조옥자 가수가 김부자의 ‘일자상서’를 부르자 객석 한쪽에서는 눈시울을 훔치는 어르신도 있었다. ISMB 인터넷서울음악방송국 이명진 원장은 ‘전선야곡’을 불렀고, 한국교통장애인협회 김태진 회장은 묵동성결교회 한상길 담임목사의 “범사에 감사하라”는 축도의 말을 전했다. 마지막에는 출연진과 어르신들이 함께 ‘고향의 봄’을 불렀다. 노래가 끝난 뒤에도 박수는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김 회장의 꿈은 아직 남아 있다. 남북의 어르신들이 함께하는 큰 경로잔치를 여는 일이다. 그는 남북 어르신 각각 1500명씩 모시고 민족문화 중심의 공연을 펼치고 싶다고 말한다. 이름도 정해뒀다. ‘한민족 대동제 얼쑤 아리랑’. 마무리는 사물놀이가 좋겠다는 구상까지 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오늘은 여전히 작은 무대에 있다. 요양원 강당, 복지시설 한쪽, 누군가의 오후를 밝히는 한 시간. 그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객석을 바라본다. 얼굴은 또렷하지 않아도 웃음소리는 선명하다. 박수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노래가 끝나면 다시 마음을 다해 인사한다.
청운요양원의 봄날 오후, 늘푸른샘의 무대는 그렇게 다시 흘렀다.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조명이 아니라 박수로 길을 찾는 사람. 김민 회장이 세운 작은 공연장은 그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무대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