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조선 시조문학의 거장 고산 윤선도가 벗으로 삼았던 은은한 보름달 아래, 남도 종가의 기품을 간직한 해남의 고택과 정원이 비밀스러운 밤의 빗장을 연다.
전남 해남군은 오는 30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고산윤선도유적지 일원에서 밤의 정취와 전통문화를 함께 호흡하는 ‘고산유적지 달빛 산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평소 낮 시간에만 관람할 수 있었던 고산윤선도박물관과 땅끝순례문학관, 고산오우가정원 등이 이날만큼은 오후 9시까지 문을 열고 한밤의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낮 동안 고즈넉한 고택과 정원으로 보이던 공간이 어둠이 내리면 시와 차, 그리고 은은한 달빛이 머무는 조용하고 아늑한 야간 여행지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된다.
해남읍 연동마을에 자리한 고산윤선도유적지는 조선 시조문학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의 숨결과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역사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해남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공간이다.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 가옥인 녹우당을 비롯해 비자나무숲, 박물관, 문학관, 정원이 한데 모여 있어 남도 특유의 종가문화와 기품 있는 정원 양식을 한눈에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고산 윤선도는 우리가 잘 아는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통해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다섯 가지 벗으로 노래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연물들은 오늘의 여행자에게 여전히 변함없는 위로를 건넨다.
특히 달은 고산의 시 세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마음을 이어주는 가장 핵심적인 상징이다. 그런 점에서 달빛 아래 녹우당의 돌담길을 걷는 것은 단순한 야간 관람을 넘어, 시인이 누렸던 옛 풍류와 예술적 영감을 온몸으로 따라가는 특별한 체험이 된다. 이번 행사는 이러한 보름달 밤의 낭만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다채로운 참여형 문화 프로그램도 함께 엮어냈다.
먼저 땅끝순례문학관에서는 실을 엮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스트링아트 체험인 ‘내 손안의 보름달’이 진행된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실로 달을 형상화하며 참가자들 스스로가 마음속에 품은 다섯 가지 벗을 떠올려보는 시간이다. 고산윤선도박물관 다도체험실에서는 은은한 등불 아래 전문 강사의 지도에 따라 전통 차를 우려내고 마시는 다도 체험이 마련된다. 뜨거운 찻잔을 손에 쥐고 차향을 음미하는 느린 시간은 유적지의 고요한 밤 분위기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문학관 로비에서는 오감을 만족시킬 시화풍정 ‘담소’ 공연이 펼쳐진다. 잔잔한 음악과 시 낭송이 어우러지는 공연을 감상한 뒤 동선을 따라 밤의 고산오우가정원으로 나서면, 조명 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는 나무와 돌들이 고산의 오우가 구절들을 눈앞의 풍경으로 다시 재현해낸다. 한 공간에서 공연과 체험, 산책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동선을 설계해 관람객들이 서두르지 않고 깊이 있게 밤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고산윤선도유적지는 사적 제167호인 녹우당을 비롯해 국보 제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해남윤씨 가전 유물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남도 종가의 문화유산이 집약된 곳이다. 최근에는 정형화된 관광지를 벗어나 깊이 있는 역사 문화를 체험하려는 이들에게 지역 매력 자원으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해남 여행의 필수 코스인 대흥사, 미황사, 땅끝마을과 연계하기 좋아, 낮에는 해남의 수려한 자연과 유적을 둘러보고 저녁에는 이곳으로 돌아와 달빛 산책으로 하루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웰니스 여행 동선이 가능하다.
해남군 관계자는 “달빛이 쏟아지는 고산유적지는 도심의 화려한 야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울림과 마법 같은 평온함을 선물할 것”이라며 “이번 달빛 산책을 통해 많은 군민과 관광객들이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와 자연이 빚어내는 특별한 밤의 정취를 만끽하고 지친 일상의 피로를 풀고 가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해남의 밤은 인공적인 불빛으로 화려하게 반짝이기보다 은은한 달빛과 함께 스스로 깊어진다. 달빛이 녹우당의 오랜 기와지붕과 정원의 흙길, 그리고 문학관의 창가에 처연하게 내려앉는 시간. 고산윤선도유적지에서의 달빛 산책은 시인의 오래된 시 한 줄을 나침반 삼아 느리게 걸어보는, 남도 야간 여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