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경주 서악동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신라 왕릉의 둥근 능선과 오래된 송림 사이로 작약이 만개하면서 천년고도의 봄이 초여름 문턱에서 가장 화려한 얼굴을 드러냈다.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과 서악서원 인근 작약단지에 붉은색, 분홍색, 흰색 작약이 활짝 피었다. 고분과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펼쳐진 꽃밭에는 초여름 정취를 즐기려는 시민과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꽃길을 걷는 사람들은 봉분 능선과 작약이 한 화면에 담기는 지점마다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남긴다.
서악동 작약단지는 경주에서도 계절감이 선명한 꽃 명소로 꼽힌다. 무열왕릉, 서악동 고분군, 서악서원, 서악동 삼층석탑이 가까워 꽃구경과 역사 산책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경주시 관광 안내에는 무열왕릉 뒤편으로 서악동 고분군이 이어지고, 산책로도 잘 가꿔져 있어 여유롭게 걷기 좋다는 설명이 담겨 있다. 태종무열왕릉은 왕릉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 유적으로, 비석의 이수에 새겨진 ‘태종무열대왕지비’ 글씨가 그 근거가 됐다.
작약은 크고 풍성한 꽃잎, 은은한 향, 짧은 개화 기간으로 봄의 끝을 알리는 꽃으로 사랑받는다. 서악동에서는 이 짧은 계절감이 신라 유적의 고요함과 만나 독특한 풍경을 만든다. 무덤의 완만한 곡선, 낮게 드리운 소나무 그늘, 꽃잎이 겹겹이 열린 작약밭이 어우러지며 경주다운 장면을 완성한다.
최근에는 서악마을 일대의 작약 풍경이 사진 명소로 알려지면서 가족 단위 관광객과 연인, 사진 동호인들의 방문도 늘고 있다. 꽃밭 사이를 걷다 보면 오래된 돌담과 마을길, 서원 주변의 고즈넉한 분위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황리단길과 대릉원, 동궁과 월지 중심의 경주 여행에서 조금 벗어나 서악동으로 향하면 한결 차분한 경주를 만날 수 있다.
서악동의 꽃 풍경은 주민과 지역단체가 오랜 시간 가꿔온 문화유산 활용의 결과이기도 하다. 신라문화원은 2016년부터 서악동 삼층석탑 주변에 구절초를 심기 시작했고, 2018년부터 작약 재배를 확대해 현재 약 1000평 규모의 꽃밭을 조성했다. 올해도 서악동 삼층석탑 앞 야외무대에서는 작약꽃과 왕릉 경관을 배경으로 음악회가 이어지고 있다.
경주는 벚꽃, 겹벚꽃, 이팝나무에 이어 작약까지 계절마다 다른 꽃길을 내어준다. 봄의 절정이 보문호와 대릉원 일대에서 시작됐다면, 늦봄과 초여름의 시선은 서악동으로 옮겨간다. 꽃을 보러 온 길이 왕릉 산책이 되고, 왕릉을 걷던 길이 다시 마을 여행으로 이어진다.
최혁준 경주시장 권한대행은 “서악동 작약단지는 신라 천년고도의 역사경관과 계절 꽃 풍경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경주의 대표 관광명소”라며 “시민과 관광객들이 계절마다 아름다운 경주의 매력을 체감할 수 있도록 관광환경과 경관 관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서악동의 작약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이 지금의 경주를 보러 간다. 천년 왕릉 곁에서 피어난 꽃들은 화려하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짧지만 깊다. 경주의 초여름은 그렇게 작약 한 송이의 붉은 결 속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