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지리산 화엄사의 밤은 조용했다. 휴대전화 알림 대신 풍경 소리가 들렸고, 가족들은 오래 미뤄둔 말을 천천히 꺼냈다. 낯선 산사에서 보낸 하룻밤은 다문화가정에게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서로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됐다.
전남 구례군가족센터는 지난 25일부터 1박 2일 동안 화엄사에서 다문화가정 8가정 23명을 대상으로 ‘함께하는 쉼, 함께하는 마음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가족 구성원 간 상호 이해를 높이고, 일상에서 쌓인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마련됐다.
참여 가족들은 화엄사 템플스테이를 통해 한국 전통문화와 지리산 자연을 함께 경험했다. 프로그램은 문화유산 해설로 시작됐다. 화엄사의 역사와 전각, 석등과 석탑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며 가족들은 사찰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오랜 시간의 기억을 품은 공간임을 배웠다.
화엄사는 지리산 자락을 대표하는 고찰이다. 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각황전 앞 석등과 사사자 삼층석탑 등 굵직한 문화유산을 품고 있다. 국보인 사사자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유산으로 꼽힌다. 산사의 고요와 오래된 석조문화재는 가족들이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액막이 체험과 사찰음식 체험도 이어졌다. 가족들은 함께 손을 움직이고 음식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사찰음식은 자극적인 맛보다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리는 데 초점을 둔다. 느리게 씹고 조용히 먹는 식사는 가족에게 또 다른 소통의 시간이 됐다.
가족 소통 시간에는 평소 쉽게 꺼내지 못했던 마음을 나눴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긴 어려움, 자녀 양육의 고민, 부부 사이의 오해가 조심스럽게 오갔다. 한 결혼이주여성은 “가족 모두가 처음으로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남편과 자녀들과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여행과 복지, 전통문화가 만난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템플스테이는 불교문화 체험을 넘어 현대인에게 휴식과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는 여행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구례에서는 그 무대가 화엄사라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지리산의 숲, 천년 사찰의 공기, 가족의 대화가 한곳에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박미연 구례군가족센터장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다문화가족의 소통 부재를 해소하고 건강한 가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군 관계자는 “다문화가족은 지역사회를 함께 이루어가는 소중한 구성원”이라며 “앞으로도 안정적인 지역사회 적응을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구례군가족센터는 구례행복가족복합센터에 자리하고 있다. 가족상담, 관계 개선 프로그램, 취약·위기가족 긴급지원, 다문화가족 한국어교육 등을 운영하며 지역 가족의 생활 적응과 회복을 돕고 있다.
화엄사에서의 하룻밤은 큰 행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걷고, 먹고, 말하는 시간은 작지 않았다. 산사의 고요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본 가족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구례의 봄밤은 그렇게 한 가정의 대화를 조금 더 깊게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