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검은 먹물이 화선지 위를 소리 없이 가로지른다. 때로는 폭포수처럼 강렬하게, 때로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획의 궤적은 한 예술가가 평생을 바쳐 닦아온 마음의 길이다. 붓을 든 손의 떨림까지 예술이 되는 곳, 강릉아트센터가 이 봄의 정점에서 전통 서예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무대를 마련했다. 반백 년 넘게 묵향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서예가 소암 조문규의 손끝에서 피어난 170여 가지의 서사(敍事)가 관람객을 기다린다.
강릉아트센터는 오는 28일부터 5월 10일까지 아트센터 제1·2·3전시실에서 기획 초대 「소암 조문규 서예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평생 서예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조문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자리로, 그의 예술적 사유가 응축된 170점 내외의 대규모 서예 작품이 공개된다. 관람객들은 작가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탄탄한 필력과 전통 서예가 지닌 조형미, 그리고 그 안에 깃든 깊은 정신성을 한자리에서 마주하게 된다.
소암 조문규 작가와 붓의 인연은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글을 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붓을 들었던 소년은 학창 시절 미술 교사의 따뜻한 칭찬 한마디를 계기로 본격적인 서예가의 길을 선택했다. 특히 그는 상고시대 상형문자의 원형적인 형상과 문자가 변천해온 기나긴 역사적 과정에 깊은 흥미를 느끼며 작업을 이어왔다. 그에게 서예는 단순히 글씨를 쓰는 기술이 아니라, 억겁의 시간과 인간의 정신이 응축된 고도의 예술 행위였다.
전시의 구성은 ‘어제 오늘, 그리고’라는 세 가지 테마로 흘러간다. 제1전시실 ‘어제’에서는 옛 선인들의 글씨를 본떠 쓰는 법첩 임서를 중심으로, 전통의 기초를 견고히 다져온 작가의 인고의 시간을 조명한다. 이어지는 제2전시실 ‘오늘’은 서예를 낯설어하는 현대 관람객들을 위해 한글 해석문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예술과 대중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작가의 섬세한 시도를 담았다. 마지막 제3전시실 ‘그리고’에서는 예술의 본향 강릉에서 가장 ‘나다운’ 삶과 작업을 지속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와 향후 행보를 담담히 전한다.
소암 조문규 작가는 전시를 앞두고 “이번 전시는 화려한 꾸밈을 덜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라며, “지나온 시간과 오늘날의 작업,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마음가짐을 관람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소회를 밝혔다.
전시가 열리는 강릉아트센터는 강릉의 문화 예술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인근에는 경포호와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등 강릉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명소들이 즐비하다. 전시 관람 후 묵향의 여운을 안고 강릉의 봄 풍경을 산책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여행 코스가 된다. 특히 강릉은 예로부터 문향(文鄕)으로 불릴 만큼 서예와 문학의 뿌리가 깊은 도시인만큼, 이번 특별전은 도시의 정체성과도 결을 같이 한다.
심규만 강릉아트센터관장은 “이번 특별전은 한 작가의 치열한 예술 여정을 통해 전통 서예가 지닌 깊이와 현대적 의미를 동시에 조명하는 소중한 자리”라며, “다양한 관람객이 서예의 미학과 그 속에 담긴 선비 정신을 새롭게 접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전시는 총 12일간 이어지며, 월요일은 휴관이다. 신록이 짙어가는 5월, 강릉아트센터를 가득 채운 묵향의 향연은 일상에 지친 방문객들에게 차분한 사색과 위로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여행수첩] 서예전 더 즐겁게 보기
서예 전시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소암 조문규 전시는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제2전시실에 마련된 한글 해석문을 먼저 읽고 글씨의 형상을 바라보면 작가가 획 속에 담고자 했던 감정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전시 관람 후에는 인근 초당동에서 강릉의 맛을 즐기거나 안목 해변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더해보자. 붓의 흐름과 파도의 리듬이 묘하게 닮았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