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남쪽 마을에서 먼저 피고 진 꽃들이 산 아래로 흘러가고 난 뒤, 해발 높은 능선 위에서 진달래는 조금 늦게 제 차례를 맞았다. 그래서 노고단의 봄은 서두르지 않는다. 천천히 올라온 사람에게만, 바람을 견딘 꽃의 얼굴을 보여준다.
능선은 온통 분홍빛이다. 바위와 마른 풀, 아직 겨울빛이 남은 관목 사이로 진달래가 번지듯 피어났다. 가까이서 보면 작은 꽃송이들이지만, 멀리서 보면 산 하나가 부드러운 색으로 물든다. 길은 꽃 사이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 자꾸 걸음을 늦춘다. 사진을 찍으려 멈추고, 바람을 맞으려 멈추고, 아무 말 없이 바라보려 다시 멈춘다.
노고단의 진달래는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다. 낮은 곳의 꽃들이 봄의 시작을 알린다면, 이곳의 꽃은 봄의 절정을 조용히 확인시킨다. 겨울을 넘긴 가지에서 피어난 색이라 더 선명하고, 거센 산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모습이라 더 애틋하다. 꽃은 산을 덮었지만 산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지리산의 능선과 하늘, 먼 골짜기의 깊이를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데크길을 따라 오르면 시야가 넓어진다. 파란 하늘 아래 분홍빛 능선이 펼쳐지고, 길 끝에는 노고단의 둥근 봉우리가 기다린다. 그 길을 걷는 일은 꽃구경이라기보다 계절의 높이를 확인하는 일에 가깝다. 봄이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는 사실, 그 봄을 만나기 위해 사람도 조금은 숨을 고르며 올라와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된다.
지리산의 봄은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마을에서 시작해 계곡을 지나 숲을 건너고, 마지막으로 노고단 능선에 닿는다. 그래서 이 분홍빛은 늦은 봄의 선물이다. 꽃이 지기 전, 바람이 더 세지기 전, 노고단은 지금 가장 환하다. 산 위에서 다시 피어난 봄이 지리산의 능선을 오래도록 물들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