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경주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한동안 내국인 중심으로 움직이던 유적지 산책길에 이제는 다양한 언어와 복장이 자연스럽게 섞인다. 첨성대 주변과 동부사적지, 황룡사지 일대에서는 단체 관광객만큼이나 개별 여행객의 움직임이 또렷해졌고, 사진을 찍고 천천히 걷고 오래 머무는 체류형 여행의 결도 한층 짙어졌다. 경주가 다시 ‘보는 도시’에서 ‘머무는 도시’로 넘어가는 장면이다.
숫자도 이 흐름을 뒷받침한다. 경주시는 2026년 1분기 외국인 방문객이 24만4739명으로 집계돼 지난해 같은 기간 22만7108명보다 7.8% 증가했다고 16일 밝혔다. 월별로 보면 1월 6만5687명, 2월 6만7822명, 3월 11만1230명으로 집계됐다. 특히 비수기로 꼽히는 2월 증가율이 20.5%를 기록하며 전체 상승세를 견인했다. 관광의 계절 편차가 줄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국가별 흐름도 눈길을 끈다. 중국 관광객이 약 4만6000명으로 전체의 19%를 차지하며 증가세를 이끌었고, 러시아와 인도네시아, 미국 방문 비중도 확인됐다. 예전처럼 특정 국가에만 기대는 구조에서 벗어나 유입 국가가 넓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실제 현장에서도 동북아권 중심의 익숙한 풍경을 넘어 히잡을 쓴 중동권 관광객, 유럽권 개별 여행객, 동남아 가족 단위 방문객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 드물지 않다. 이질감보다 자연스러움이 먼저 느껴지는 변화다.
이 흐름의 배경에는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의 후광도 겹쳐 있다. 지난해 10월 27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주간은 도시의 국제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렸고, 경주는 ‘천년의 역사도시’이자 국제행사를 치를 수 있는 목적지라는 이미지를 함께 확보했다. 올해 1분기 외국인 증가세를 모두 APEC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정상회의 이후 경주를 바라보는 해외 시선이 넓어진 것은 분명하다. 행사 후에도 도시 브랜드 효과가 관광시장으로 번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경주가 가진 기본 체력도 여전하다. 첨성대와 대릉원, 황룡사지, 교촌마을은 걸어서 이어보기 좋은 동선으로 연결되고, 역사 유산과 골목, 체험 콘텐츠가 한 도시 안에서 촘촘하게 맞물린다. 황룡사지는 무료로 둘러볼 수 있고, 교촌마을에는 한복·다도·장류·떡메치기 같은 체험 요소가 살아 있다. 최근에는 대릉원돌담길 축제 같은 계절형 행사도 이어지며 체류 시간을 더 늘리고 있다. 오래된 도시가 요즘 여행의 감각을 덧입는 방식이다.
도시도 손을 놓고 있지 않다. 경주시는 APEC을 앞두고 동부사적지 일원에 계절별 꽃단지와 산책로, 포토존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했고, 대릉원과 불국사 일대 편의시설 정비도 함께 진행했다. 유산 자체의 힘에만 기대지 않고, 외국인 관광객이 더 편하게 걷고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넓히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셈이다. 관광의 경쟁력이 이제는 유적의 양보다 체험의 질과 동선의 편안함에서 갈린다는 점을 경주도 잘 알고 있다.
최혁준 경주시장 권한대행은 “외국인 관광객 증가와 함께 관광시장 다변화가 본격화되고 있다”며 “국적별 특성을 반영한 콘텐츠 발굴과 관광 인프라 개선을 통해 체류형 관광 기반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경주는 원래도 유명한 도시였지만, 지금의 경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커지고 있다. 많이 보는 도시를 넘어 오래 걷고, 자주 찍고, 천천히 머무는 도시로 바뀌는 중이다. APEC이 남긴 국제적 주목도, 계절마다 덧입는 콘텐츠, 유산과 일상이 섞이는 동선이 한데 맞물리면서 경주의 관광지도도 다시 그려지고 있다. 천년고도의 다음 장면은 숫자보다 현장에서 먼저 시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