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 끝자락, 중구 다운동 골목 안으로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동네의 속도가 확실히 달라진다. 낮은 담장과 오래된 집들이 이어지고, 골목 끝에서는 막걸리 익는 냄새가 바람처럼 번진다. 그 조용한 자리에서 운곡도가는 손님을 맞고 있었다. 이름은 다운동의 옛 지명인 운곡마을에서 따왔다.
구름이 끼는 골짜기. 그 이름을 닮아 이 집의 술병에는 토끼 한 마리와 몽글한 구름이 올라앉아 있다. 예쁜 라벨로 먼저 눈길을 끌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술은 보기 좋은 술이 아니라 오래 버텨낸 술이라는 걸 알게 된다.
운곡도가의 시작은 황광조 대표의 결심에서 출발했다. 그는 2017년까지 대형 유조선과 선박 건조 현장을 관리하던 신조감리 일을 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늘 어릴 적 할머니가 빚던 가양주의 맛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정확한 레시피도 없었고, 남은 것은 혀끝에 남은 기억과 ‘다시 한번 제대로 살려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일을 접고 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처음엔 그야말로 맨손이었다. 전국의 양조장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서울의 한국전통주연구소에서 기초부터 다시 익혔다. 그렇게 어린 시절 집안에서 마시던 가양주의 결을 하나씩 되살렸고, 2018년에는 아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술을 내놓기 시작했다.
실제 현장에서 만난 황광조 대표의 말투에는 ‘사업’보다 ‘복원’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렸다. 돈이 먼저 보였던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집안에서 이어오던 술맛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결국 다시 시작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술이 팔리는 건 아니었다. 운곡도가가 처음 내놓은 대표 술 황감찰은 진하고 깊었다.
삼양주 방식으로 빚어 존재감이 뚜렷했고, 아는 사람은 바로 알아보는 맛이었다. 문제는 울산 시장이었다. 다른 지역에는 이미 프리미엄 막걸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낯선 술을 천천히 설득하며 키워야 하는 지역 시장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쉽게 보면 안 되는 일이었는데, 너무 순하게 시작한 면도 있었다고 그는 웃으며 털어놨다. 곧이어 코로나까지 닥쳤다. 개업 이후 3년은 정말 버티는 시간에 가까웠다고 했다. 술은 빚었지만 손님 흐름은 늘 제자리였다.
그 곁에 아들 황정의 대표대행이 있었다. 요식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연스럽게 아버지 곁으로 들어왔다. 대학 때부터 길러온 긴 머리는 이제 어깨까지 내려와 제법 또렷한 인상을 남긴다.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인데, 술 이야기에 들어가면 눈빛이 갑자기 바빠진다. 그는 운곡도가를 크게 키우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옛날 주막처럼 알차게 가고 싶다”는 뜻을 여러 번 꺼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보다, 한 번 찾아온 손님이 편하게 머물다 가는 곳. 대형화보다 내실. 지금의 운곡도가를 설명하는 데 가장 정확한 말이었다.
그 방향에서 나온 술이 토끼구름이다. 황감찰이 운곡도가의 뿌리라면, 토끼구름은 운곡도가의 현재다. 한 모금 들이키면 달큰한 첫 향 뒤로 배와 멜론 같은 과실 향이 가볍게 스친다. 끝에는 바닐라처럼 부드러운 잔향이 남는다. 보기에는 가볍고 사랑스러운데, 만드는 과정은 전혀 가볍지 않다.
토끼구름은 운곡도가의 현재를 보여주는 술이자, 아들 황정의 대표대행의 감각이 가장 또렷하게 반영된 막걸리다. 그는 부드럽고, 전통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편하게 마실 수 있으며, 특히 여성들에게도 거부감이 적은 막걸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방향을 잡고 향과 질감, 도수의 균형을 다듬어 지금의 토끼구름이 나왔다. 이름에도 사연이 있다. 전국 인맥을 통해 여러 이름을 받아봤고, 디자이너 한 분이 보내온 몇 가지 후보 가운데 ‘토끼구름’이 가장 또렷하게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듣는 순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술의 이미지가 바로 그려졌고, 실제 맛의 인상과도 잘 맞아 최종 이름으로 정했다는 설명이다.
황정의 대표대행은 술맛 이야기만큼 제도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현장의 체감은 분명했다. 작은 가양주 양조장 입장에서는 술을 더 잘 빚고, 상품을 더 정교하게 만들고, 시장에 더 잘 알리는 데 써야 할 시간이 서류와 절차에 자꾸 묶인다는 것이다. 실제 제도 구조를 보면 이 말이 완전히 뜬금없는 푸념은 아니다.
주류 제조 면허와 제조방법 검토 등은 국세청 주류면허지원센터 체계와 연결돼 있고, 식품 안전관리와 품목제조보고는 식약처 소관이며, 전통주 산업 진흥은 농식품부 축으로 움직인다. 정부도 2025년 들어 전통주 산업 활성화 대책을 내놓으며 신규 진입 지원과 규제 완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현장의 바람은 단순하다. 생색나는 1회성 지원보다, 작지만 제대로 된 양조장이 새로운 술을 연구하고 시장에 안착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농촌진흥청과 지자체의 역할을 강조했다. 젊은층과 외국인 입맛에 맞는 신규 막걸리를 만들려면 결국 누룩과 발효기술 쪽 연구가 더 넓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대목도 허투루 들리진 않았다. 농촌진흥청은 실제로 누룩곰팡이 분류 연구, 막걸리 청량감 조절 기술, 양조용 품종과 발효기술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현장의 양조장들이 원하는 건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그런 기술이 소규모 도가까지 닿게 해주는 연결일 것이다.
운곡도가를 나설 때 골목은 처음처럼 조용했다. 다만 들어갈 때와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다. 토끼구름의 귀여운 라벨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는 점이다. 선박을 보던 아버지는 술로 돌아왔고, 요식업 감각을 품은 아들은 그 술이 사람들 일상으로 스며드는 길을 찾고 있었다. 운곡도가는 지금도 작다. 하지만 작은 양조장이어서 오히려 더 또렷한 맛이 있다. 크게 벌리기보다 단단하게 쌓아가는 집, 한 잔을 팔기보다 한 번 더 찾아오게 만드는 집. 울산 다운동 골목에서 그 부자는 오늘도 주막의 시간을 다시 빚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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