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고창 청보리밭에 서면 가장 먼저 바람이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바람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끝도 없이 이어진 초록 결이 한쪽으로 눕고 다시 일어서는 장면은 꽃보다 조용하고, 바다보다 깊다. 사람들은 흔히 봄을 벚꽃으로 기억하지만, 고창의 봄은 이렇게 푸른 숨결로 먼저 다가온다. 환하게 비어 있는 하늘 아래, 청보리는 말없이 흔들리며 제 계절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이 풍경 앞에서는 이상하게 말이 줄어든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단순한 밭인데, 마음은 자꾸 멀리까지 걸어간다. 키를 다 세우지 못한 보리들이 바람을 따라 일제히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삶도 저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진다. 끝까지 버티는 것만이 강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오래가는 힘일지 모른다고. 고창의 청보리밭은 그런 생각을 조용히 건네는 곳이다.
한낮의 햇살 아래서는 초록이 유난히 맑고, 해가 기울 무렵이면 들판은 금빛을 머금는다. 그 사이를 걷는 사람들은 누구나 잠시 시인이 된다. 사진을 찍으러 왔다가도 어느 순간 카메라를 내리고 그냥 바라보게 된다. 너무 넓고, 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마음속 복잡한 생각들이 먼저 정리된다. 여행은 낯선 곳에 가는 일이지만, 때로는 잊고 있던 자기 마음을 다시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고창 청보리밭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위로한다.
초록은 화려하지 않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고창의 바람은 오늘도 보리밭을 쓸고 지나가며 한 계절의 가장 부드러운 문장을 쓰고 있다. 그 앞에 서면 알게 된다. 봄은 피는 것만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계절은 이렇게, 조용히 흔들리며 우리 곁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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