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봄의 구례는 꽃만 보는 곳이 아니다. 천년 고찰의 마당을 지나 오래된 나무 곁을 걷고, 잠시 멈춰 서서 악기 소리를 듣는 사이 여행은 풍경에서 사유로 넘어간다. 전남 구례군은 지난 4월 1일 지리산 자락 화엄사 일대에서 올해 첫 번째 ‘구석구석 문화가 있는 날’ 걷기 프로그램을 열었다. 평일 오전인데도 적지 않은 참가자가 모였고, 구례의 봄을 걸어서 만나려는 발길이 화엄사 경내를 채웠다.
이번 행사는 단순한 봄나들이보다 인문 탐방에 가까웠다. 참가자들은 해설가의 안내를 따라 화엄사 경내를 걸으며 절집의 역사와 봄 생태를 함께 들여다봤다. 각황전 앞 홍매화와 오래된 올벚나무, 들매화가 이어지는 길은 화사한 꽃길인 동시에 구례의 시간을 품은 길이었다. 화엄사 홍매화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봄 명소다. 국가유산포털에 따르면 화엄사 화엄매는 수고 8m가 넘는 큰 매화나무로, 붉은 꽃빛과 굴곡진 수형이 뛰어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한국관광공사 역시 화엄사 각황전 옆 홍매화를 전남의 대표 매화 명소로 소개하고 있다.
화엄사의 봄은 눈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걷기가 무르익을 무렵, 고즈넉한 경내 한편에서는 해금 연주가 이어졌고, 산사의 공기 위로 번지는 선율이 참가자들의 걸음을 붙잡았다. 꽃과 절집, 나무와 악기 소리가 한 자리에서 포개지는 풍경은 구례가 왜 걷기 여행지로 사랑받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빠르게 찍고 이동하는 관광과 달리, 이 프로그램은 오래 머물고 천천히 듣는 여행에 가깝다. 화엄사의 봄이 사람을 모으는 이유도 결국 그 느린 호흡에 있다.
구례는 원래 걷기 좋은 고장이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맞물린 지형 덕분에 사찰길과 강변길, 마을길이 촘촘히 이어진다. 구례 대표 명소인 사성암은 오산 절벽 위에 자리한 암자로 섬진강 조망이 빼어나고, 천은사와 노고단 일대 역시 계절마다 다른 걸음의 맛을 보여주는 곳으로 꼽힌다.
정부와 관광기관이 소개해온 구례 여행 정보에서도 화엄사, 사성암, 노고단은 사색과 풍경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대표 코스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번 프로그램이 화엄사 편을 시작으로 사성암, 천은사, 오래된 마을길 등으로 확대될 예정이라는 점은 그래서 더 반갑다. 한 번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례 전체를 걷는 문화 지도로 넓혀갈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요즘 여행은 점점 ‘많이 보는 것’보다 ‘깊게 느끼는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구례의 이번 걷기 프로그램은 유행을 좇기보다 지역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화엄사의 역사, 지리산 자락의 생태, 지역 문화예술이 한데 어우러진 이 길은 관광상품이라기보다 한 고장의 성격을 보여주는 산책에 가깝다. 구례가 가진 강점은 유명 관광지 몇 곳이 아니라, 그 장소들을 걸어서 연결할 때 비로소 살아나는 결에 있다.
홍매화 절정은 짧지만, 그 꽃을 지나 걷는 시간은 오래 남는다. 화엄사에서 시작된 올해 첫 걸음은 구례가 봄을 보여주는 방식을 잘 말해준다. 꽃을 앞세우되 꽃으로 끝내지 않고, 풍경을 열어 보인 뒤 결국 사람의 마음까지 데려가는 길. 구례의 봄은 지금, 그렇게 한 걸음씩 깊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