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경주의 시간은 흔히 돌과 탑, 무덤에서 먼저 읽힌다. 그런데 경주에는 지금도 사람이 살며 시간을 이어가는 세계유산이 있다. 강동면 양동리의 양동마을이다. 초가와 기와가 능선을 따라 놓이고, 오래된 종가와 서당, 정자가 골짜기와 들판을 내려다보는 이 마을은 박제된 유적이 아니라 생활이 남아 있는 역사 그 자체다. 경주시가 올해 양동마을 보수·정비사업을 본격 추진하기로 한 것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세계유산’을 지키기 위한 작업에 가깝다.
양동마을은 1984년 국가민속유산 제189호로 지정됐고,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등재됐다. 지정 면적은 96만9115㎡에 이르며, 2025년 12월 말 기준 131세대 200명이 거주하고 441동의 전통 건축물이 남아 있다. 경주를 대표하는 세계유산 가운데서도 양동마을이 특별한 이유는, 유산이 과거형으로 멈춰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지금도 주민이 살고, 집이 숨 쉬고, 계절에 따라 지붕과 담장, 마당의 표정이 바뀐다.
경주시는 올해 총 22억7400만원을 들여 양동마을 보존과 관리 강화를 위한 7개 보수·정비사업을 추진한다. 국비는 15억5850만원이 포함됐다. 주요 내용은 퇴락가옥 14가옥 정비, 초가 이엉잇기 사업, 흰개미 방제, 두곡고택 보수공사, 송첨종택 모니터링 용역, 이향정·사호당 고택 보수 실시설계 용역 등이다. 특히 초가 이엉잇기는 107세대 242동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눈에 띄는 새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집이 제 모양을 잃지 않도록 손보는 일들이다.
이 사업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문화유산의 원형 보존, 다른 하나는 실제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정주 여건 개선이다. 노후·훼손된 전통가옥을 정비하고 초가 지붕 유지관리와 해충 방제를 하는 것은 보기 좋은 풍경을 위한 일만이 아니다. 구조 안전과 생활 환경을 함께 챙겨야 세계유산이 오래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시는 관광객 안전 확보를 위한 주변 환경 정비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잘 보존된 유산’과 ‘살기 괜찮은 마을’이 따로 갈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양동마을은 경주 여행에서도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대릉원이나 첨성대가 신라의 왕경을 보여준다면, 양동마을은 조선의 생활과 유교 질서, 전통 가옥의 배치를 온전히 체감하게 하는 공간이다. 경주시 관광안내에 따르면 이 마을에는 무첨당과 향단, 관가정 같은 보물급 건축을 비롯해 수많은 고택이 남아 있고,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동족마을 구조가 지금까지 이어진다. 산줄기와 계곡을 따라 집이 놓인 배치 자체가 이미 하나의 풍경이자 문화유산이다. 경주가 ‘신라의 도시’라는 인상에만 머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도 양동마을은 천천히 봐야 제맛이 나는 곳이다. 마을 입구의 문화관에서 전체 구조를 이해하고,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고택의 지붕선과 담장 너머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다른 경주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공식 누리집에 따르면 양동마을은 계절별 관람시간을 두고 운영되며, 해설 프로그램과 전통문화 체험도 함께 운영한다. 단순히 인증사진 몇 장 남기고 떠나는 명소가 아니라, 느린 걸음으로 읽어야 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번 보수·정비사업은 관광 기사로도 의미가 있다. 눈에 띄는 새 랜드마크를 만드는 개발은 아니지만, 양동마을 같은 곳에서는 이런 손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변화다. 이엉을 새로 얹고, 퇴락한 가옥을 다잡고, 흰개미를 막는 일은 결국 여행자가 보게 될 풍경의 품질을 지키는 일과 같다. 오래된 유산은 화려한 조명보다 꾸준한 관리로 빛난다. 경주시가 이번 사업을 통해 전통 경관 보존과 주민 생활, 관광 활성화를 함께 잡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세계유산을 가진 도시 가운데 하나다. 불국사와 석굴암, 경주역사유적지구, 양동마을, 옥산서원까지 이어지는 유산의 스펙트럼은 넓다. 그 가운데 양동마을은 유독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더 각별하다. 이번 사업은 과거를 고치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게 만드는 일에 가깝다. 세계유산이란 결국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동마을의 아름다움은 잘 지어진 집 몇 채에만 있지 않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가 지붕,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담장, 그 안에서 지금도 이어지는 생활이 함께 만들어낸 풍경에 있다. 그래서 세계유산을 지키는 일은 거창한 선언보다, 낡은 지붕을 다시 얹고 무너진 집을 보수하는 작은 손길에서 시작된다. 경주가 올해 양동마을에 들이는 시간과 예산은 결국 한 마을의 오늘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여행자는 그 덕분에, 오래된 조선의 시간을 내일도 다시 걸을 수 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