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유명한 절집은 많지만, 어떤 여행지는 작은 비석 하나로 오래 기억된다. 삼척 두타산 자락의 천은사가 그렇다. 산문을 지나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그곳엔 풍경보다 먼저 시간을 붙드는 흔적이 있다. 이번에 강원특별자치도가 천은사 기실비를 새 문화유산자료로 지정한 것은, 바로 그 조용한 흔적에 지역의 역사를 다시 불러 세운 일에 가깝다.
강원특별자치도는 3월 6일 ‘삼척 두타산 천은사 기실비’를 도 문화유산자료로 신규 지정 고시했다. 이 비석은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산312-1 일대, 천은사 입구에 자리한 유적으로 1921년 세워졌다. 당대 대표적 문장가로 꼽히는 박한영이 글을 짓고, 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한 명필 심지황이 글씨를 썼다. 자연석 위에 거북 모양을 새긴 귀부형 받침, 비신, 팔작지붕 형태의 가첨석을 갖춘 형식도 주목된다.
이 비석이 더 중요한 이유는 내용에 있다. 천은사의 창건 설화와 연혁, 중창 불사 같은 사실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어 단순한 기념비를 넘어 지역사 자료로서의 무게를 지닌다. 비문의 문장과 서체, 조형 양식까지 함께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지역 불교 문화와 향토 지식인의 흔적을 한 자리에서 읽을 수 있다. 강원도는 이번 지정을 통해 도내 국가유산 보유 건수가 총 745건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천은사 자체도 여행지로서 결이 깊다. 한국관광공사와 삼척시 자료를 보면 천은사는 두타산 기슭에 자리한 산사로, 고려 말 학자 이승휴와의 인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승휴는 이 일대에서 머물며 ‘제왕운기’를 남긴 인물로 전해지며, 천은사 주변에는 그의 유적도 남아 있다. 그러니 이번 문화유산 지정은 비석 하나의 보존에 그치지 않고, 천은사와 두타산 일대가 품은 역사 서사를 다시 또렷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두타산은 원래도 강원 남부를 대표하는 산행지 가운데 하나다. 높이 1357m의 산세와 계곡, 기암, 숲이 어우러져 사계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봄과 가을 산행은 물론, 천은사처럼 산 아래 자리한 고찰을 들러 천천히 걷는 일정도 잘 어울린다. 이름난 절경만 훑고 지나가는 여행과 달리, 문화유산 하나를 매개로 장소의 시간을 함께 읽는 여행은 훨씬 오래 남는다. 삼척 여행이 바다에만 머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척은 죽서루와 해변, 동굴, 해안 절경으로 먼저 떠오르는 도시지만, 내륙 쪽으로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전혀 다른 표정이 펼쳐진다. 미로면 두타산 자락은 화려하진 않지만 깊다. 계곡과 산사, 오래된 이야기와 비석 하나가 서로 기대어 서 있는 풍경은 요란한 관광지의 속도와는 다르다. 이번 지정으로 천은사 기실비는 더 이상 스쳐 지나가는 유물이 아니라, 삼척을 다시 보게 만드는 하나의 이유가 됐다.
좋은 여행지는 새로운 시설보다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을 때 더 강해진다. 삼척 두타산 천은사 기실비의 이번 지정은 그런 사실을 다시 보여준다. 두타산의 산기운, 천은사의 고요, 그리고 돌 위에 남은 문장의 시간까지. 올봄 삼척 여행은 바다에서 끝나지 않고 산사 입구의 작은 비석 앞에서 더 깊어질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