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강바람이 먼저 달을 데려온다. 경주 안강읍 칠평천 둔치에 서니, 사람들의 숨결이 모여 밤의 온도를 조금씩 올리고 있었다. 정월대보름(3월 3일) 밤, 달은 유난히 붉어졌고—그날 안강은 ‘동네 축제’라는 말을 새로 증명했다.
안강읍 애향단체 안맥회(회장 이해성)가 마련한 ‘제19회 시민 한마음 문화축제’에는 읍민 1000여 명이 모였다. 달집태우기를 중심에 두고 척사대회(윷놀이), 읍민 재능기부 색소폰 연주, 축하공연, 떡국 나눔이 촘촘히 이어졌다. 행사장 한쪽에서는 국물이 끓는 김이 피어올랐고, 다른 한쪽에서는 윷판의 환호가 터졌다. 아이들은 불빛을 따라 뛰었고, 어른들은 “올해는 덜 아프자” “집안이 평안하자” 같은 말로 서로의 소원을 대신 적어주었다.
행사의 뼈대는 ‘기원제’였다. 관공서와 기관·사회단체장, 주민들이 함께 모여 지역의 안녕과 건강을 빌었다. 이어 달집 앞에 걸린 소원문이 바람에 흔들릴 때, 누군가는 손을 모으고 누군가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둥근 달을 매개로 공동체가 다시 연결되는 순간이다. 정월대보름이 농경사회에서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빌던 세시풍속이었다면, 오늘의 달집태우기는 ‘이웃의 안부를 확인하는 의식’에 가깝다. 한 번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는 건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같은 떡국 그릇을 나누는 일부터 시작되니까.
올해는 하늘의 사건도 행사의 분위기를 밀어 올렸다. 보름달이 붉게 보이는 ‘붉은 달’ 현상이 겹치며, 칠평천 둔치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더 자주 하늘로 향했다. 달집의 불꽃이 위로 치솟고, 그 뒤편에서 달빛이 어둠의 결을 바꿔놓는 장면은 사진보다 기억에 오래 남는다.
무엇보다 눈에 띈 건 안전이었다. 건조하고 바람 센 날이 잦아 산불 위험이 커진 요즘, 안맥회와 여러 사회·자생단체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소방·경찰·지자체가 협조해 비상 대응체계를 갖췄다. 불을 다루는 축제일수록 ‘괜찮겠지’ 대신 ‘확인하자’가 먼저여야 한다는 걸, 현장은 알고 있었다.
안맥회는 1989년 설립된 안강읍 대표 애향단체다. 50세 이상 회원들로 구성된 특우회도 위문금 전달, 연탄 나눔, 환경정화 등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해성 회장은 “참여와 협조 덕분에 안전하고 뜻깊게 마무리했다”고 했고, 주낙영 경주시장은 “안강의 달집태우기가 지역 대표 전통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말은 짧았지만, 그날 둔치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이미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여행자는 보통 ‘볼거리’를 찾아 움직이지만, 안강의 대보름은 ‘사람’을 보러 가는 자리였다. 달집이 타오르는 몇 분 동안, 각자의 근심은 불꽃 속으로 접혀 들어가고 대신 “잘 지내자”는 인사가 남는다. 경주가 천년의 시간을 품은 도시라면, 안강의 대보름은 오늘의 시간을 서로에게 건네는 방식이었다. 내년에도 달은 뜰 것이다. 다만 그 달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 곁에 있느냐가, 여행의 감도를 바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