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문소지 기자] 문화는 국경을 넘을 때 숫자가 아니라 태도로 기억된다. 2026년 1월 28일, 런던에서 열린 한 강연은 K-컬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줬다. 주영한국문화원 선승혜 원장은 영국 현지에서 열린 영국한국협회(BKS) 70주년 기념 특별 고별 강연에서 K-컬처의 새로운 비전으로 ‘공감’을 제시했다.
강연의 주제는 ‘K-소프트 파워의 이해: 영향력에서 공감으로(Understanding K-Soft Power: From Influence to Empathy)’. 사회는 British Korean Society 회장이자 전 주한영국대사인 사이먼 스미스가 맡았다. 이날 현장에는 마틴 유든, 찰스 헤이 전 주한영국대사, 마틴 프라이어 전 주한영국문화원장 등 한국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영국 외교·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지난 3년간 선 원장이 이끈 문화외교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이임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응원했다.
선 원장은 강연에서 “지난 3년 런던에서 목격한 것은 K-컬처의 단순한 확장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차트 순위와 수출액으로 대표되는 ‘영향력’의 단계에서, 세계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연결하는 ‘공감’의 단계로 한국 문화가 진입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K-팝과 드라마의 세계적 확산을 넘어, 감정과 가치의 공유가 일어나는 지점이 K-컬처의 다음 장이라는 진단이다.
그는 이러한 공감의 뿌리를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정신에서 찾았다. ‘제 뜻을 펼치다’는 창제의 취지가 오늘날까지 한국 문화 전반에 흐르는 정서라는 설명이다. 백성을 향한 연민과 사랑에서 출발한 언어의 철학이, 현대의 음악과 영상, 문학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해석이다. 최근 한국 문학이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는 흐름 역시 이 연장선에서 읽힌다.
재임 기간 선 원장은 한국 문화를 영국 주류 문화 담론 속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열린 ‘Hallyu!’ 전시는 한류를 단순한 유행이 아닌 동시대 문화 현상으로 조명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술 시장에서는 프리즈 서울과 프리즈 런던을 잇는 교류를 통해 한·영 미술계의 접점을 넓혔고, 테이트 모던, 헤이워드 갤러리, 서펜타인 갤러리 등과의 협력으로 한국 작가와 담론을 영국 예술계 중심에 소개했다.
이러한 성과는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았다. 전통과 현대, 예술과 기술을 잇는 기획은 한국 문화가 ‘초대받는 대상’에서 ‘함께 논의되는 주제’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사이먼 스미스 BKS 회장은 “선 원장은 한영 문화교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며 “그가 남긴 문화적 유산과 파트너십은 양국 관계의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선 원장은 영국 학계에서 ‘AI와 문화’ 연구를 이어갈 뜻을 밝혔다. 현장의 외교 경험과 학문적 연구를 결합해, 기술 시대의 문화외교 전략을 모색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과 해외 미술관, 지방 공립미술관, 외교부를 거쳐 주영한국문화원장에 이르기까지 이론과 실무를 넘나든 경력을 바탕으로, 문화외교 전략가로서의 여정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K-컬처는 더 이상 얼마나 멀리 갔는지를 증명하지 않는다. 대신 얼마나 깊이 닿았는지를 묻는다. 런던에서 던져진 ‘공감’이라는 키워드는 한국 문화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좌표다. 영향력을 넘어 마음으로 향하는 길, 그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