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제사상에 숟가락 하나 얹어줄 핏줄 하나 남기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이들은 결코 외롭지 않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마을 주민들이 수십 년째 깎듯이 자식을 자처하며 정성껏 제사상을 올리는 감동적인 향토 미풍양속이 강원도 홍천 골짜기에서 이어지고 있다.
무후자 봉행·사진제공=홍천군
무후자 봉행·사진제공=홍천군홍천군 내촌면은 6일 오전 내촌면 무후자 제각에서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난 이들의 숭고한 넋을 위로하고 고마운 은덕을 기리는 ‘2026년 무후자 제례’를 엄숙하게 봉행했다.
'무후자(無後者)'란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내촌면 무후자 제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굴곡진 현대사를 거치며 홀로 살다 떠나면서도,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전 재산을 고향 마을의 공동 발전과 후손들의 학업을 위해 흔쾌히 내놓은 48위 영령의 공덕을 기리는 자리다. 이들의 숭고한 뜻을 잊지 않기 위해 면민들은 면 단위 합동 제단을 마련하고 매년 늦가을마다 한마음으로 합동 제사를 올려오고 있다.
이날 제례는 화상대리에 거주하는 김종국 씨가 숙연한 목소리로 축문을 낭독하며 시작됐다. 이어 김도현 내촌면장과 김종주 노인회 분회장, 허태봉 이장협의회장이 각각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맡아 정갈하게 빚은 술잔을 정성껏 올렸다. 제단 앞에는 지역 기관단체장들과 각 리의 이장, 노인회 어르신 등 주민 70여 명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머리를 조아리고 고인들의 영면을 함께 기원했다.
핏줄 중심의 전통 제례 문화를 뛰어넘어, 마을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맺은 이 따뜻한 '사회적 효(孝)'의 역사는 내촌면의 커다란 정신적 자산이다. 고인들이 남겨준 토지와 기금은 오늘날까지 면내 복지 사업과 학생들을 위한 장학 혜택으로 이어지며 지역의 든든한 주춧돌이 되고 있다. 주민들은 제사를 지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계절 내내 제각 주변을 말끔히 청소하고 풀을 뽑으며 내 부모의 묘소를 돌보듯 살뜰히 가꿔왔다.
김도현 내촌면장은 "자신의 피붙이 대신 고향 이웃과 후손들을 위해 평생의 결실인 전 재산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가신 48위 무후자 어르신들의 숭고한 나눔은 각박해진 현대 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며 "오늘 이 제례가 마을의 뿌리를 기억하고 세대와 이웃 간의 화합과 끈끈한 애향심을 다지는 소중한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첩첩산중 맑은 물이 흐르는 홍천 내촌면은 백우산과 용소계곡, 수령 수백 년의 고목들이 어우러져 호젓한 늦가을 산책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고장이다. 화려한 볼거리 대신 옛사람들의 온기 어린 나눔과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나가는 사람들의 진심이 골목마다 깊숙이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