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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0] 006. 무주의 가을은 더 깊어진다
붉은 치마를 두른 적상산, 머루 향기, 역사의 숨결과 예술의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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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11월의 무주는 가을을 서둘러 떠나보내지 않는다. 산허리에 마지막 단풍이 머물고, 차가워진 바람에는 낙엽 냄새가 묻어난다. 화려했던 계절이 조금씩 빛을 내려놓는 시간. 적상산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붉은 숲은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마음을 붙잡는다. 무주의 가을은 눈으로만 보는 풍경이 아니다. 천천히 걸으며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이야기다.
◆ 머루 향기 따라 시작된 가을
머루와인동굴 입구·© 최치선·트래블아이 적상산 자락의 머루와인동굴에서 하루를 연다. 양수발전소 건설 당시 사용하던 터널은 이제 무주 머루의 향기를 품은 특별한 공간이 됐다. 서늘한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찬바람이 잊힌다. 은은한 조명 아래 가지런히 놓인 와인병들이 여행자를 맞는다.
머루와인동굴 터널경관·© 최치선·트래블아이 
머루와인 동굴·© 최치선·트래블아이 
와인동굴·© 최치선·트래블아이 머루와인을 한 모금 음미하니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한 향이 입안에 남는다. 와인족욕장에서는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잠시 쉬어간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도 이곳에서는 조금 느려진다. 여행이란 어쩌면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잊고 있던 여유를 되찾는 일인지 모른다.
머루와인동굴 머루와인 시음장·© 최치선·트래블아이 
머루와인동굴 와인잔 조형물·© 최치선·트래블아이 ◆ 붉은 치마를 두른 산, 천년의 시간을 걷다
동굴을 나와 적상산으로 오른다. '붉은 치마'라는 이름처럼 산은 가을마다 붉게 물든다. 11월의 숲은 절정의 화려함 대신 깊어진 색을 보여준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낙엽이 흩날리고, 굽이치는 산길 아래로 무주의 들녘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적상호 전망대에 서면 겹겹이 이어진 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 세상은 작아지고, 마음속 걱정도 함께 작아진다. 멀리 덕유산 자락에 내려앉은 늦가을 햇살이 부드럽다.
적상산 전망대·© 최치선·트래블아이 안국사에 이르면 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고려시대 창건된 이 사찰은 적상산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 왔다. 단청을 입은 처마 끝으로 낙엽이 내려앉고, 고요한 경내에는 늦가을의 적막이 흐른다. 극락전 앞에 잠시 서서 세월의 무게를 헤아려 본다. 수백 번의 가을이 지나갔어도 산사의 고요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상산 안국사·© 최치선·트래블아이 인근 적상산 사고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기록을 지켜낸 역사의 공간이다. 복원된 사고 건물 앞에서 나라의 기억을 보존하려 했던 옛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린다. 한 장의 기록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낙엽 하나가 발치에 내려앉는다. 역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딛고 선 땅에도 살아 있다.
◆ 돌문을 지나 생명의 빛을 만나다
설천면으로 향하는 길에는 라제통문이 기다린다. 신라와 백제의 옛 경계 지역에 자리한 이 돌문은 서로 다른 시간과 문화를 이어주는 듯하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 반대편으로 나오면 같은 하늘인데도 풍경이 새롭게 느껴진다. 삶에도 이런 문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지나온 시간을 뒤에 두고 새로운 마음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문.
라제통문·© 최치선·트래블아이 태권도원에서는 산사의 정적과 다른 활기가 느껴진다. 힘찬 발차기와 절도 있는 움직임에는 오랜 수련의 시간이 담겨 있다. 태권도박물관을 둘러보며 한 사람의 작은 몸짓이 세계인의 문화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생각한다.
반디랜드에 들어서면 여행의 분위기는 다시 부드러워진다. 곤충박물관의 작은 생명들과 천문과학관의 드넓은 우주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반딧불이가 빛나는 계절은 지났지만, 그 작은 빛이 전하던 생명의 소중함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도, 추억도 그렇다.
무주곤충박물관·© 최치선·트래블아이 
반디랜드·© 최치선·트래블아이 ◆ 마지막 붓끝에 남은 가을
무주읍으로 돌아와 최북미술관에 들른다. 조선 후기 화가 최북의 예술세계를 마주하는 시간이다. 산수화 속 거친 붓질과 여백에는 자연을 바라보던 한 화가의 마음이 스며 있다. 그림 앞에 오래 서 있다 보니 낮에 보았던 적상산 능선이 떠오른다. 산과 그림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술관을 나서니 어느새 저녁이다. 서쪽 하늘에 남은 노을이 산마루를 붉게 물들이고, 나무들은 마지막 잎새를 내려놓는다. 아침에 맡았던 머루 향기와 안국사의 고요, 돌문을 지나던 바람이 하나씩 되살아난다.
가을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물들이지만 끝내 붙잡지는 않는다. 나무가 잎을 보내듯 사람도 때로는 오래 품었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늦가을 여행은 조금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
돌아오는 길, 차창 너머로 무주의 산들이 어둠 속에 잠긴다. 하루 동안 수많은 풍경을 만났지만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이름 없는 산길에 떨어지던 낙엽 한 장이다.
가을은 떠나고 있었지만 무주는 그 계절을 오래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순간은 붙잡을 때보다 조용히 보내줄 때 더 오래 기억된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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