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서동휘 기자] 천년의 세월을 건너온 고운 한지 빛이 런던의 늦가을 밤을 은은하게 밝혔다. 부처의 탄생을 축하하며 온 누리에 자비와 희망을 전하던 한국 고유의 연등이 지구 반대편 영국 시민들의 손끝에서 화사한 꽃잎을 틔웠다. 주영한국문화원은 런던 현지에서 한국 전통 연등 문화를 알리고 현지인들이 직접 등을 만들어보는 ‘연등 만들기 체험 행사’를 열고 깊은 울림을 전했다.
신라 시대부터 무려 1,2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연등회는 지난 202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한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월초파일 관등놀이에서 시작해 세대와 종교의 벽을 허물고 누구나 어우러지는 화합의 대동 축제로 발전해 왔다. 이번 런던 행사는 눈으로만 감상하는 일방적인 전시를 넘어, 영국인들이 한국 전통 공예의 정수를 살갗으로 느끼며 등불 하나하나에 담긴 평화와 번영, 나눔의 철학을 공유하도록 기획됐다.
문화원 행사장에 모인 참가자들은 대나무 살과 철사로 뼈대를 세우고 오색 빛깔의 고운 한지 꽃잎을 한 장씩 정성스레 덧붙여 나갔다. 손끝에 풀을 묻혀가며 집중하던 현지인들은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힌다는 연등의 상징성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등이 완성된 뒤 촛불 모양 전구에 불을 켜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며 따스한 온기가 감돌았다.
한국문화원 행사장에서 현지 참가자들이 오색 한지로 만든 연등을 들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촬영했다.·사진제공=주영한국문화원이번 연등의 향연은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박물관(대영박물관)으로 무대를 넓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영국박물관은 10월 31일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박물관 회원 가족들을 초청해 야간 숙박 체험인 ‘한국 탐험(Explore Korea)’을 열었다. 밤이 내린 웅장한 박물관 홀에서 가족 단위 관람객들은 연등을 손수 빚고 한국 전통 무용과 구전 설화를 감상하며 밤을 지새웠다.
대영박물관에서 열린 연등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직접 만든 연등을 들고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사진제공=주영한국문화원이어 이튿날 아침에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기증품을 중심으로 한국 명품 고미술과 찬란한 유산을 조명하는 대규모 특별전 <한국(Korea)>을 둘러보며 한국 미학의 깊이에 흠뻑 빠져들었다. 11월 1일 오후에는 일반 관람객들이 대거 참여한 야외 연등 행렬이 펼쳐졌다. 직접 만든 등을 손에 쥐고 박물관 안팎을 거니는 수백 명의 인파는 런던 도심에 장관을 연출했다.
박효건 주영한국문화원장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연등회의 진정한 가치는 모두가 함께 등을 밝히며 연대하고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 정신에 있다"며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영국박물관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한국의 유·무형 유산이 현지 시민들에게 깊은 감동으로 스며들었길 바란다. 앞으로도 현지 유수 문화예술기관과 손잡고 한국 문화의 다채로운 매력을 알리는 체험형 프로그램을 꾸준히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런던 하늘 아래 환하게 피어난 전통 연등은 국경과 언어를 뛰어넘어 전 세계인에게 따스한 위로와 평화의 메시지를 건네는 문화 외교의 든든한 등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