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선
[대한민국 100] 005.정선...바람이 머문 자리
사랑이 깃든 숲과 구름 속 가리왕산
은빛 억새가 출렁이는 민둥산과 동강의 하늘
화암동굴의 어둠에서 발견한 삶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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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서울을 떠난 새벽 다섯 시, 도시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어둠의 가장자리가 조금씩 붉어졌다. 차창 밖 산등성이에 아침빛이 내려앉고, 정선에 가까워질수록 산은 노랑과 주홍, 붉은빛으로 깊어졌다. 가을이 이토록 많은 색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민둥산에 도착했을 때 새벽 공기는 손끝이 시릴 만큼 차가웠다. 전날 내린 비로 산길은 축축했다. 미끄러운 흙길을 조심스럽게 오르자 젖은 낙엽 냄새가 발걸음을 따라왔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무렵 숲이 끝나고, 눈앞에 믿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졌다.
민둥산 산등성이의 억새밭과 산책로 전경.·© 최치선·트래블아이 억새였다. 산등성이를 가득 메운 억새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수만 개의 이삭이 한 방향으로 몸을 눕혔다가 다시 일어섰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그 물결 사이에 서 있자 내가 산에 오른 것인지,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민둥산 정상 부근에서 은빛 억새밭과 산길이 어우러진 가을 풍경.·© 최치선·트래블아이 해발 1118.8m 정상에 섰다. 사방으로 산줄기가 뻗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힘겹게 올라온 길도 억새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뺨을 스쳤다. 오래전 잊고 지낸 누군가가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는 듯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이 풍경이 조금 더 오래 머물러주기를 바랐다.
민둥산을 내려와 병방치 스카이워크에 올랐다. 투명한 유리 바닥 아래로 아찔한 절벽이 펼쳐졌다. 동강은 산자락을 휘감으며 거대한 한반도 지형을 그리고 있었다. 강물은 말없이 흐르는데 그 곡선은 오래 바라볼수록 아름다웠다.
가리왕산 자락 로미지안가든의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 모양 포토존과 산 중 풍경.·© 최치선·트래블아이 
굽이치며 흐르는 동강의 상류 모습.·© 최치선·트래블아이 짚와이어에 몸을 맡긴 순간, 세상이 발아래로 멀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계곡과 강줄기가 눈앞으로 달려왔다. 불과 1분 남짓한 비행. 그러나 허공에 몸을 던진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무거운 생각들마저 바람에 흩어지는 듯했다. 어쩌면 자유란 그렇게 잠깐 자신을 놓아주는 일인지도 몰랐다.
짚와이어를 타고 내려다본 동강과 산골짜기 풍경.·© 최치선·트래블아이 오후에는 가리왕산 자락의 로미지안가든을 찾았다. 병을 이겨낸 아내를 위해 남편이 오랜 세월 가꿨다는 정원이다. 숲길에 들어서자 촉촉한 나무 냄새가 밀려왔다. 가시버시성의 아리탑을 지나 햇빛이 내려앉은 길을 걸었다. 이곳의 돌과 나무, 조형물 하나하나에는 누군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리석문 앞에서 종을 세 번 울렸다. 맑은 종소리가 산자락으로 번져갔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원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긴 세월 한 사람을 바라보며 나무를 심고 길을 내고 꽃을 가꾸었을 것이다. 그 사랑이 숲이 되었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대한민국 100] 바람이 머문 자리, 정선의 가을](https://hodabgpnhciikfrpzais.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article-photos/uploads/2026-10-29/ceda5e2b-d164-43b6-ac8d-d8cd256ec935.webp)
사진제공=로미지안가든 가리왕산 케이블카에서는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산 아래 단풍은 눈부셨지만 높이 오를수록 짙은 안개가 밀려왔다. 마침내 창밖의 산들이 사라지고 하얀 구름만 남았다. 기대했던 정상의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안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도, 그리움도, 우리가 살아온 시간도 그렇다.
가리왕산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단풍 든 산과 구름이 깔린 풍경.·© 최치선·트래블아이 
구름에 잠긴 가리왕산 케이블카 승강장 모습.·© 최치선·트래블아이 하루의 마지막은 화암동굴이었다. 서늘한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환한 가을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래전 금을 캐던 광부들의 흔적이 남은 어둠 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만난 거대한 석회동굴은 수없이 긴 세월이 빚어낸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금빛 조명이 동굴 벽을 비추었다. 아름다운 빛 너머로 이곳에서 땀 흘렸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금은 부의 상징이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둠 속에서 견뎌야 했던 하루의 무게였을 것이다. 그 생각에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저녁빛이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새벽부터 달려온 긴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돌아보면 정선에서 만난 것은 풍경만이 아니었다. 민둥산에서는 흔들리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억새를 보았고, 동강 위에서는 잠시 두려움을 내려놓았다. 로미지안의 숲에서는 사랑이 남기는 흔적을, 가리왕산의 안개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화암동굴에서는 어둠을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을 만났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산 너머로 마지막 햇살이 사라지고 있었다. 문득 아침 민둥산에서 보았던 억새가 떠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면서도 끝내 제자리를 지키던 그 은빛 물결.
우리 삶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고, 때로는 길을 잃고,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지나기도 한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다시 우리를 비춰줄 한 줄기 햇살이 남아 있을 것이다.
정선을 떠나는 길, 산들은 더 이상 화려한 색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둠 속에 조용히 잠겨갈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오늘 만난 가을은 산에 남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내 마음에서 흔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대한민국 100] 바람이 머문 자리, 정선의 가을](https://hodabgpnhciikfrpzais.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article-photos/uploads/2026-10-29/ceda5e2b-d164-43b6-ac8d-d8cd256ec935.we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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