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양평
[대한민국 100] 004. 양평, 강물처럼 흐른 하루
쉬자파크 숲길에서 미리내 힐빙클럽까지, 마음에 남은 다섯 풍경
황순원의 소나기를 지나 세미원의 연꽃과 두물머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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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서울을 벗어나 양평으로 향하던 아침, 차창 밖으로 산과 들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기 위해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잊고 지낸 나를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인지도 몰랐다. 도시는 멀어지고 초록은 점점 짙어졌다.
용문산 자락의 쉬자파크에 도착했을 때 기온은 이미 33도를 넘나들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더위였지만 숲에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나무들이 만들어 놓은 그늘 아래로 바람이 지나갔고, 흙냄새와 풀향기가 걸음을 붙잡았다.
양평 쉬자파크 입구의 녹음이 우거진 전경.·© 최치선·트래블아이 숲해설가 서명애 씨는 무더위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가파른 길에서는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사진을 찍어 보라며 걸음을 멈췄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숲길에서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나무의 이름보다 그 따뜻한 배려였다. 자연이 사람을 위로한다지만, 때로는 자연 속에서 만난 사람이 더 깊은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명상의 숲을 지나 치유전망대에 이르자 용문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초록의 능선이 겹겹이 이어졌다. 아무 말 없이 산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속 소음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양평 쉬자파크 내 맨발걷기길 입구 안내판.·© 최치선·트래블아이 미리내 힐빙클럽에서는 몸의 속도를 늦췄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자 긴장이 풀렸다. 은은한 아로마 향기 속에서 눈을 감고, 싱잉볼의 울림에 귀를 기울였다. 맑고 긴 진동이 공간을 채우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소리가 멈춘 뒤에도 그 여운은 한동안 마음속에 머물렀다.
미리내 힐빙클럽의 실내 발 마사지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방문객들.·© 최치선·트래블아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소리를 들으며 살았을까. 사람들의 말과 자동차 경적, 휴대전화 알림까지. 정작 내 마음이 들려주는 소리에는 얼마나 귀를 기울였을까. 숲 명상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자 별다른 대답 없이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소나기마을에 들어서자 여행은 오래전 기억 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처음 읽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소년과 소녀가 들판을 걷고, 갑작스러운 빗줄기를 피해 몸을 숨기던 장면.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풋풋한 설렘만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전시관에는 작가의 원고와 유품이 남아 있었다. 낡은 만년필과 안경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한 사람이 남긴 문장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누군가의 가슴을 적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소나기마을 내 전시관 내부의 조명과 전시물 일부.·© 최치선·트래블아이 영상체험관에서는 소나기가 쏟아지고 반딧불이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빛과 소리로 되살아난 소설 속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누구에게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한 편의 소설처럼 마음속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다.![[대한민국 100] 004. 양평, 강물처럼 흐른 하루](https://hodabgpnhciikfrpzais.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article-photos/uploads/2026-10-27/74c55c20-744b-4e1c-9ff8-5012aff6f9cf.webp)
소나기마을에 있는 영상체험관·© 최치선·트래블아이 세미원에 도착했을 때는 연꽃과 연잎이 넓은 연못을 채우고 있었다. 물 위에 피어난 꽃들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세미원이라는 이름에는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세미원 입구의 전통 한옥 문과 태극 문양이 있는 원형 문.·© 최치선·트래블아이 연못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진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도 맑은 꽃을 피워 내는 연꽃 앞에서 문득 사람의 삶을 생각했다. 누구나 저마다의 진흙탕을 지나며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뿌리를 내렸느냐보다 어떤 꽃을 피우느냐는 것인지도 몰랐다.
세미원의 연못 산책로와 연꽃 주변 풍경.·© 최치선·트래블아이 하루의 마지막은 두물머리였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하나의 물길이 되는 곳. 오래된 느티나무가 넓은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얼마나 많은 만남과 이별을 지켜보았을까.
두물머리의 강과 산 풍경, 자연 액자가 설치된 모습.·© 최치선·트래블아이 강물은 말없이 흘렀다.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 두 물줄기는 이곳에서 만나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고집하지 않았다. 하나가 되어 먼 길을 떠나는 물을 바라보며, 살아가면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생각했다.
해가 기울자 강 위로 부드러운 빛이 번졌다. 카메라를 들어 마지막 풍경을 담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사진 속에 담기지 않는 것이 있었다. 숲해설사의 미소와 싱잉볼의 울림,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기억, 연꽃 앞에서의 사색, 강물이 가르쳐 준 조용한 깨달음이었다.
양평에서 보낸 하루는 특별한 사건 없이도 충분히 깊었다. 숲은 쉬어 가라고 했고, 문학은 잊었던 시간을 불러냈으며, 강물은 흘러가는 법을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길에야 알았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일이 아니라, 세상에 빼앗겼던 나의 시간을 잠시 되찾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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