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섬진강국제실험예술제 공식 포스터로, 행사명과 주요 프로그램이 담겨 있다.·사진제공=곡성군
[트래블아이=서동휘 기자] 벼를 베어낸 논두렁이 런웨이로 변하고, 거친 농기구가 설치미술로 다시 태어났다. 오래전부터 섬진강 물길을 지켜온 도깨비와 두꺼비가 사람들의 몸짓과 소리를 타고 가을 숲과 강변으로 불려 나온다. 농촌의 거친 흙과 물, 바람 위에 세계 각국의 전위 예술가들과 흙 묻은 장화를 신은 마을 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한바탕 신명 나는 예술의 장을 펼친다.
가을 들녘 논두렁에서 꽃과 함께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예술가의 모습.·사진제공=곡성군
논두렁 논밭 사이에서 춤추고 있는 다섯 명 여성들의 화려한 퍼포먼스 현장.·사진제공=곡성군
사진제공=곡성군
사진제공=곡성군‘섬진강별곡 2 – 자연에 스미다’를 기치로 내건 제24회 섬진강국제실험예술제(SIEAF)가 23일 오후 5시 전남 곡성군 압록유원지 특설무대에서 화려하게 닻을 올린다. 지난 9월부터 농촌의 투박한 일상 도구를 재조명한 아카이브전, 생태와 농촌의 내일을 모색한 학술 심포지엄, 황금빛 논두렁 패션쇼로 예열을 마친 축제는 이제 압록유원지의 물줄기와 옥과 묵은숲, 동화정원의 꽃밭으로 무대를 확장하며 본 궤도에 오른다.
이번 개막전의 백미는 곡성에 깃든 전설과 바다 건너 일본 민속의례가 한자리에서 격돌하고 화해하는 주제공연 ‘위드(With) 도깨비 & 두꺼비’다. 고려 개국공신 마천목 장군의 효심에 감복해 어살(물고기를 잡는 돌살)을 지어주었다는 도깨비 이야기와 섬진강 나루터에서 왜구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두꺼비 전설은 자연과 인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이 공존해 온 곡성 고유의 신화적 자산이다.
곡성에 전해지는 전설과 일본 전통 민속 의례가 함께 펼쳐지는 주제공연의 모습.·사진제공=곡성군무대는 이 오래된 옛이야기를 단순히 무대 위로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른 일본 아키타현 오가 반도의 ‘나마하게(섣달그믐 액운을 쫓고 게으름을 꾸짖는 내방신)’ 전통과 일본의 전위 신체예술인 ‘부토(Butoh)’를 끌어들여 언어와 국경의 장벽을 무너뜨린다. 짚풀 옷과 험상궂은 가면을 쓴 나마하게와 장난기 넘치면서도 신령한 도깨비가 몸의 원초적 감각으로 만나 화해의 춤을 추며, 반목과 갈등으로 얼룩진 현대 사회에 평화와 상생의 메시지를 묵직하게 던진다.
축제의 서막을 여는 ‘섬진생명굿’은 관객이 무대 밖 구경꾼에 머무르지 않는 진정한 열린 제의다. 한영애, 김서균, 양향진, 김평부 등 몸짓과 제의적 퍼포먼스에 잔뼈가 굵은 작가들이 일상의 도구를 두드리고 부딪치며 잠든 대지의 기운을 흔들어 깨운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축제를 앞두고 주민들이 직접 일궈낸 ‘도깨비쌀 모으기’ 프로젝트다. 곡성 레저문화센터와 곡성농협 등 7곳에 쌀독을 설치해 주민과 여행자 100여 명이 십시일반으로 한 줌씩 모아 올린 쌀이 이번 생명굿의 핵심 제물이 됐다. 뙤약볕 아래서 농부의 땀방울로 맺힌 쌀은 나눔과 생명의 결정체다. 이렇게 모인 쌀은 축제 당일 떡과 술로 빚어져 모인 이들의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는 공동체 나눔 잔치로 이어진다. 관객이 곧 창작의 주체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도깨비 분장을 한 축제 참가자가 논두렁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모습.·사진제공=곡성군국제적인 문화 교류의 결도 한층 깊어졌다. 방글라데시 누룰 하크 국무장관과 주한 방글라데시 대사가 곡성을 찾아 자국 공연단 6명을 격려하고 문화 협력의 보폭을 넓힌다. 현대무용수와 마임 예술가들로 꾸려진 방글라데시 공연단은 ‘평화’를 화두로 언어를 초월한 신체 언어를 펼쳐 보인다. 여기에 대만의 세계적 서커스 퍼포머 우하오종(Wu Haw Jong)이 선보이는 LED 디아볼로 묘기와 먹물 디아볼로 페인팅, 엄예은의 공중 에어리얼 퍼포먼스, 밤하늘을 수놓는 하냥살이의 낙화불꽃, SAIPA의 강렬한 불꽃놀이가 가을밤 섬진강을 뜨겁게 달군다.
이어지는 무대는 정화와 치유의 시간이다. ‘북쟁이’ 성상식의 묵직한 대북 연타와 김윤정의 서슬 퍼런 검무가 액운을 씻어내고, 한국 전통 가락을 월드뮤직으로 엮어내는 그룹 더튠과 쿠바 보컬리스트 기예르모가 호흡을 맞춘다. 미디어 아티스트 신동원과 전위 행위예술가 모지민은 생성형 인공지능 영상과 살아 숨 쉬는 신체의 충돌을 통해 21세기 디지털 도깨비의 부활을 형상화한다.
소리와 춤의 잔치는 쉼 없이 이어진다. 모로코 아티스트 오마르와 소리꾼들의 교감에 이어, 산과 강을 따라 삶의 애환을 노래해 온 정선군립아리랑예술단의 정선아리랑이 섬진강 물결을 타고 흐른다. 퍼포먼스 아티스트 성백은 입에 머금은 먹물을 뿜어내며 캔버스 위에 거친 도깨비의 얼굴을 일필휘지로 완성해 낸다. 토케토리팀의 몽환적인 뉴웨이브 민요 연주로 마음을 달랜 뒤, 동서양 악기의 즉흥 잼 세션에 몸을 맡기는 ‘도깨비 댄스파티’로 개막의 밤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행사를 뒷받침하는 숨은 주역은 곡성의 어머니와 청년들이다. 곡성군여성단체협의회, 대한적십자봉사회 곡성지회, 곡성여성라이온스협회, 곡성읍청년회 등 지역 주민 단체들이 무대 설치부터 안전 관리, 관람객 안내까지 도맡아 축제의 뼈대를 세웠다.
축제는 주말 내내 곡성의 자연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24일 오후 2시 옥과 묵은숲에서는 나무와 바람, 흙의 소리에 어쿠스틱 악기와 싱잉볼, 바라춤을 얹어내는 ‘산소 콘서트’와 몸의 감각을 깨우는 움직임 치유 워크숍이 열린다. 몽골의 아말사이칸, 모로코의 오마르, 뉴질랜드의 이안 존 등 다국적 작가들이 숲의 호흡에 맞춰 예술적 공명을 시도한다.
마지막 날인 25일에는 섬진강 동화정원의 샛노란 황화코스모스 물결 사이로 거대한 행렬이 이어진다. 주민과 시니어 모델, 어린이, 여행자가 저마다 손수 만든 꽃 소품을 쥐고 음악에 맞춰 춤추며 행진하는 ‘플라워 퍼레이드’다. 관객과 예술가의 구분이 완벽히 사라지는 이 거대한 꽃길 행진은 자연 속에 어우러진 인간의 연대가 얼마나 눈부신지를 온몸으로 증명한다.
황화코스모스 꽃밭을 배경으로 대규모 행렬이 펼쳐지는 축제 현장.·사진제공=곡성군이번 축제는 2028년까지 3개년에 걸쳐 추진되는 ‘농촌 유토피아형 예술 프로젝트’의 든든한 출발점이다. 쌀과 흙, 숲과 바람이 있는 농촌이 단순히 소비되는 관광지가 아니라, 삶의 경험과 예술가의 영감이 교차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잉태하는 살아있는 창작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있다.
자연에 스며든 예술의 호흡이 섬진강 물길을 따라 잔잔하지만 거대한 파문으로 번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