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가을빛 깊어가는 순천만 정원의 너른 잔디밭 위로 78년간 가슴에 묻어둔 통한의 눈물과 화해의 기도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는 여수·순천 10·19사건의 무고한 넋을 기리고, 반세기를 훌쩍 넘어선 유족들의 오랜 한을 보듬는 엄숙한 추모의 물결이 순천 도심을 적셨다.
오천그린광장에서 열린 제78주기 여순사건 합동 추념식 참석자들이 입장하는 모습이다.·사진제공=순천시순천시는 19일 오천그린광장에서 유족과 시민, 정부 관계자 등 9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제78주기 여수·순천 10·19사건 합동 추념식’을 거행했다. 여순사건명예회복위원회와 여순항쟁전국유족총연합이 주최하고 전남광주통합특별시와 순천시가 주관한 이번 행사는 ‘78년의 기다림, 이제는 대한민국이 여순의 진실을 완성하겠습니다!’라는 준엄한 슬로건 아래 열렸다. 희생자들의 온전한 명예 회복과 멈춰 서 있던 역사적 진실 규명을 반드시 매듭짓겠다는 국가적 다짐의 자리였다.
오천그린광장에 설치된 '기다림의 끝, 여순 진실을 완성'이라는 문구와 태극기가 세워진 추념식 행사장 전경이다.·사진제공=순천시추념식은 각 종단 성직자들의 종교의례와 맑은 차를 올리는 헌다, 넋을 달래는 헌무, 숙연한 시 낭송으로 문을 열었다. 10월 19일을 상징하는 정적 속에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과 헌화·분향이 이어졌고, 담담한 경과보고와 추념사, 유족대표의 떨리는 인사말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가장 뜨겁게 붉힌 순간은 유족들의 생생한 증언 영상과 인공지능(AI) 기술로 복원해 낸 유족 사연 낭독이었다. 78년 전 그날, 영문도 모른 채 가족의 품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부모와 형제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자 오천그린광장은 일순간 거대한 울음바다로 변했다. 평화의 합창이 잔디밭을 감싸 안으며 슬픔은 비로소 연대와 치유의 온기로 승화됐다.
추념식이 끝난 뒤에는 순천 승주읍 일대에서 대대로 전승돼 온 호남의 대표 전통 상례 의례 ‘오장상여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슬프면서도 망자의 원통함을 달래는 상여소리의 긴 가락은 억울하게 스러져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평생 연좌제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유족들의 굽은 등을 어루만졌다.
추념식 후 순천 승주읍에서 전통 상례 의례인 '오장상여소리'를 공연하는 모습이다.·사진제공=순천시추모의 발길을 문화와 평화의 가치로 잇는 특별한 전시도 마련됐다. 여순사건의 서사를 만화와 회화로 담아낸 김금숙 작가의 그래픽노블 『흰 신』 원화전이 여순항쟁 역사관에서 오는 11월 19일까지 한 달간 펼쳐진다. 순천을 찾은 여행자와 시민들은 비극의 역사가 예술적 붓 터치로 승화된 공간을 거닐며,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뜻깊은 다크 투어리즘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손훈모 순천시장은 “78년이라는 모진 세월 동안 가슴속에 피눈물을 삼키며 살아오신 유족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은 위로를 전한다”며 “희생자들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고 철저한 진상규명이 조속히 마무리되어 온전한 국가 위령 사업으로 꽃피울 수 있도록 순천시가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순천의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피어난 10월의 국화꽃 한 송이. 진실을 향한 78년의 간절한 외침은 이제 슬픔을 넘어 역사와 자연이 공존하는 순천 땅에서 상생과 화해라는 단단한 미래로 영글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