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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사

오산, 하루의 깊이를 걷다

돌담과 숲을 지나 저녁의 노래에 닿는 길

최치선 기자
서울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오산으로 향하는 아침이었다. 여러 번 지나친 도시였지만, 그 안에서 하루를 보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가까운 곳에는 늘 다음이라는 말을 붙여두곤 한다.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미뤄둔 풍경이 얼마나 많을까. 독산성 아래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하자 도로에서 보았던 오산이 조금씩 멀어졌다.
오산, 하루의 깊이를 걷다
© 최치선·트래블아이
성곽에 오르니 수원과 화성, 오산의 들판이 펼쳐졌다. 높지 않은 산인데도 시야는 멀리까지 열렸다. 돌담 너머로 집과 도로가 이어지고, 그 사이를 자동차들이 작게 움직였다. 여러 해 전 이곳을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같은 돌을 밟았을 텐데, 무엇을 생각하며 지나갔는지는 선명하지 않았다. 풍경은 남아 있고 그날의 나는 희미했다.
푸른 하늘 아래 녹음이 우거진 독산성 성곽과 그 아래 넓게 펼쳐진 오산과 주변 들판 풍경.
독산성 성곽에서 바라본 오산과 주변 들판 풍경으로, 오산의 자연과 도시 경관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최치선·트래블아이
동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성 안과 밖을 잇는 좁은 문은 보적사에 들어서는 해탈문이기도 했다. 몸을 조금 낮춰 문을 지나자 낮은 처마와 삼층석탑이 눈앞에 놓였다. 바깥을 경계하던 성벽 안에 기도하는 자리가 있었다. 전란 속에서도 누군가는 이 작은 절에서 무사히 돌아올 사람을 기다렸을 것이다. 대웅전 앞에 잠시 서 있으니, 멀리 내려다보던 시선이 발밑의 돌과 처마 끝으로 돌아왔다. 절 뒤편을 올라 세마대에 닿았다. 물이 부족한 성을 포위한 왜군 앞에서 권율 장군이 흰 말에 쌀을 끼얹어 물로 씻기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릴 적에는 그 지략이 통쾌했다. 이날은 말 위로 쏟아지는 쌀을 바라보았을 병사들이 마음에 걸렸다. 먹을 것을 내어주면서도 적이 물러나기를 기다렸을 사람들. 산 아래를 오래 바라보다 내려왔다. 물향기수목원에서는 걸음이 느려졌다. 성곽에서 달아올랐던 몸이 나무 그늘에 들자 차츰 식었다. 햇빛은 잎 사이를 통과하며 잘게 나뉘었고, 길 위의 밝은 자리를 밟을 때마다 숲의 깊이가 달라 보였다. 연못에는 나무와 하늘이 함께 비쳤다. 수면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기울이자 내 모습도 그 사이에 들어갔다.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길에서 벤치에 앉았다. 앞서 걷던 돌길이 벌써 먼 곳처럼 느껴졌다. 하루 안에서도 시간은 고르게 흐르지 않았다. 나무 아래 머무는 동안에는 다음 장소를 서둘러 떠올리지 않게 됐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그 뒤로 숲길이 다시 비었다. 여행을 왔다는 실감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찾아오기도 한다. 오산미니어처빌리지에 들어서자 나는 갑자기 커졌다. 광화문과 서울역, 낯선 나라의 성과 거리가 눈 아래 놓였다. 작은 열차가 움직이고 건물에 불이 켜졌다. 몸을 숙여 들여다볼수록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과 자동차가 나타났다. 아이들이 숨은 장면을 찾아 멈춰 설 때마다 나도 그 곁에서 한참을 보았다.
작은 광화문 모형과 도심 풍경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유리 난간 너머로 모형을 보고 있는 모습.
오산미니어처빌리지 내부 광화문 모형과 사람들의 관람 모습으로, 미니어처 세계의 규모감을 보여준다.·© 최치선·트래블아이
밝게 조명된 아치형 건물 내부에 미니어처로 구현된 도시의 한 부분이 보이는 모습.
미니어처빌리지 내 마르크트할 모형으로, 실제 도시의 모습을 축소하여 재현한 장면이다.·© 최치선·트래블아이
손바닥만 한 거리에도 저마다의 생활이 들어 있었다. 건물 전체를 볼 때와 창문 하나를 볼 때의 마음이 달랐다. 실제 도시에서는 건물 사이를 급히 지나치느라 놓쳤을 장면들이다. 작은 세계 앞에서 어릴 적 장난감을 늘어놓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때는 몇 개의 집과 길만으로도 오후가 충분했다. 잊고 있던 놀이의 감각이 손끝 가까이 돌아왔다. 죽미령에 이르러 다시 걸음이 무거워졌다. 1950년 7월, 먼 나라에서 온 젊은 군인들이 이곳에서 전투를 치렀다. 기념관의 기록을 따라가며 그들이 한국으로 향하던 시간을 생각했다. 지명도 언어도 낯선 땅에 내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장으로 갔을 사람들. 전시물 앞에 서 있는 동안 유리 밖의 내 얼굴이 기록 속 모습과 잠시 겹쳤다.
빨간 벽돌 바닥 광장에 세워진 유엔군 초전기념관 입구 표지판과 나무 주변의 전시장 전경.
오산에 위치한 유엔군 초전기념관 전경으로, 전쟁의 역사를 돌아보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최치선·트래블아이
붉은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는 전시관 내부에서 사람 몇 명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는 장면.
유엔군 초전기념관 내부 전시 공간으로, 관람객이 전시물을 체험하고 있는 모습이다.·© 최치선·트래블아이
밖으로 나오니 아이들이 잔디마당을 달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전쟁의 장면을 보던 아이들이 다시 서로를 부르며 뛰었다. 그 모습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아이를 따라 걷는 부모와 놀이터로 향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이곳에 남겨진 이름들과 지금 들리는 웃음소리가 같은 오후의 햇빛 아래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맑음터공원에 도착했다. 기타 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젊은 버스커의 노래에 산책하던 사람들이 멈춰 섰고, 한 곡이 끝나자 박수가 이어졌다. 나도 그 사이에서 손뼉을 쳤다. 하루 종일 걷느라 무거워진 다리를 잠시 잊었다.
푸른 하늘과 나무 사이로 높게 솟은 맑음터공원 에코리움 전망대 건물 전경.
맑음터공원 내 에코리움 전망대 모습으로, 젊은 버스커의 노래가 흐르는 공간의 일부이다.·© 최치선·트래블아이
녹음이 우거진 공원 바닥에 설치된 여러 빨간색의 뾰족한 조형물들이 모여 있는 모습.
맑음터공원 내 특이한 빨간 조형물로, 공원의 일부 예술적 조형물 풍경이다.·© 최치선·트래블아이
매립장으로 쓰이던 땅 위에서 사람들이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오산천을 따라 걷는 이들, 잔디에 앉은 가족, 다음 노래를 기다리는 얼굴들을 바라봤다. 아침에는 성벽 위에서 도시를 멀리 내려다보았는데, 이제는 그 안에 들어와 사람들과 같은 노래를 듣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 무대에서 멀어졌다. 노래는 뒤에서 계속 들렸다. 몇 걸음을 더 걷자 목소리는 희미해지고 기타 소리만 남았다. 가까운 도시에서 보낸 하루가 오래 마음에 머물 것 같았다. 오산을 떠나는 길, 창밖에는 집집이 불이 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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