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문소지 기자] 20여 년간 산과 시간의 결을 탐구해온 이준호 작가가 새로운 단계로 향한다. 갤러리 508에서 열리는 개인전 <상처의 자리, 꽃이 피다>는 칼로 긁어내는 역행적 회화 방식으로 구축해온 그의 조형 세계가 ‘꽃’이라는 생명의 형상으로 확장되는 첫 전시다.
갤러리 508 - 이준호전 포스터(제공=갤러리508)
이준호는 지난 세월 동안 자연의 형태를 단순한 풍경으로 보지 않았다. 산의 능선과 사라지는 빛, 계절을 따라 변하는 색조 속에서 보이지 않는 리듬을 읽어내고 이를 화면에 새기는 과정을 회화적 수행처럼 이어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는 붓이 아니라 ‘칼’이었다. 화면을 채우는 대신 긁어내고, 지우는 대신 흔적을 남기는 행위가 그의 회화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작품들은 강렬한 붉은빛 산을 통해 실험적 색채 감각을 드러냈다. 이후 회색·청색·흑색 등 절제된 색면으로 확장되며 자연의 호흡과 맞닿은 작업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작업들은 국내 주요 미술관의 기획전에 다수 초청되며 ‘현대 산수’라는 개념을 스스로 구축해왔다.
이번 개인전은 그의 화풍이 새로운 형상, 즉 ‘꽃’으로 진입하는 첫 장면이다. 이준호는 꽃을 단순한 장식이나 상징으로 보지 않는다. 작가는 “수만 번의 칼질은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반복해온 긁어내기의 행위는 상처에서 생명을 길어 올리는 과정이었고, 그 흔적들은 한 송이의 꽃잎과 결을 이루며 화면에 남는다.
주목할 점은 화면을 덧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가가 선택한 역행적 방식은 ‘지우고 긁어내는 행위’ 자체가 조형 언어가 되는 과정이다. 칼날의 깊이, 리듬, 속도, 방향은 꽃잎의 질감과 중심의 밀도를 결정한다. 멀리서 보면 한 송이의 꽃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균열을 지닌 표면, 켜켜이 드러난 단면, 반복된 흔적이 하나의 존재를 만든다.
이번 ‘꽃 시리즈’는 색의 절제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단색의 화면 위에 새겨진 칼날의 자국은 고요하고도 강렬한 대비를 만든다. 침묵하는 화면 속에서 미세하게 번져 나오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는, 마치 어두운 겨울을 지나 결국 터져 나오는 꽃봉오리의 에너지와도 같다.
갤러리 508 측은 “이준호 작가의 신작은 산수에서 꽃으로 이동한다는 단순한 형상 변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며 “상처와 치유, 절제와 폭발, 부정과 생성이 공존하는 새로운 조형 언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붙인 노트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한겨울 차가운 칼바람을 이겨내고 봄날 꽃봉오리가 만개하던 날, 수만 번의 칼질도 꽃이 되었다.”
이 문장은 이번 전시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상처의 자리에서 피어난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을 형상화하는 시간이 담긴 기록이다.
전시는 이준호 작가의 작품 세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전환점이며, 작가의 수행적 시간과 감각적 선(線)이 어떤 방식으로 꽃이라는 대상에 응집되는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관람객은 조형의 본질이 무엇인지, 흔적이 어떻게 회화가 되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