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김보라 기자] 전북 고창의 운곡람사르습지는 인간의 손길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연이 스스로 생태를 복원한 국내 대표 생태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2009년 모습을 드러낸 이 습지는 자연 회복의 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탐방객에게 ‘비우고 기다린다’는 보전 철학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생태 교과서다.
운곡람사르습지_ 조류관찰대(제공=한국관광공사)
고창 운곡람사르습지(오베이골습지)는 람사르협약에 의해 국제적으로 보호받는 습지다. 과거 이곳은 계단식 논과 158세대, 360여 명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1981년 인근 발전소의 공업용수 확보를 위해 운곡저수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은 사라졌고, 출입이 금지된 채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단단한 자연의 회복력이었다. 경작이 중단된 폐경지는 시간이 흐르며 산지형 저층습지로 전환되었고, 다양한 생물종이 돌아오면서 습지 생태계가 자연스럽게 복원됐다. 운곡람사르습지는 인간의 간섭 없이 자연이 스스로 복원된 보기 드문 사례로, 람사르 습지가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이 만든 소리와 빛이 순차적으로 감각을 깨운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물빛, 숲 사이를 스치는 바람,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까지… 여유로운 속도로 걸을수록 자연의 리듬이 몸 안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좁은 덱길을 걷다 보면 과거 마을 흔적을 상상하게 되고, 장기간 방치된 땅이 어떻게 생명의 거점으로 변모했는지 그 변화의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종점부의 운곡생태공원은 ‘생태+문화’라는 독특한 여행 동선을 완성한다. 홍보관에서는 복원 과정과 서식 생물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생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해 아이들과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교육적 의미를 더한다. 특히 인근에 자리한 동양 최대 규모의 고인돌은 운곡습지가 가진 ‘문화적 층위’를 더하는 상징적 장소로, 고창이 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인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운곡람사르습지는 단순한 산책 코스를 넘어 자연 보전의 철학을 직접 체험하는 공간이다. 개발 대신 기다림을 선택했을 때 자연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 회복되는지, 그리고 그 회복이 인간에게 어떤 가치로 돌아오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소리 없이 가르침을 주는 자연 교실”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지켜낸 풍경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여행자에게 잔잔하게 전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운곡람사르습지는 화려한 볼거리보다 자연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여행지다. 고요한 습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이 스스로 쓴 복원 일기의 문장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인위적인 손길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되살아나는 생명력—그 속에서 여행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