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한국인이 해외에서 실종되고 살해당하는 비극 앞에서, 우리는 국가기관의 무능보다 더 참혹한 것이 ‘침묵하는 권력’임을 확인했다.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납치·살해 사건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다. 이 사태는 국가조직의 구조적 불합리와 책임 체계 붕괴를 드러내는 경고음이다. 그런데 이 위기 속에서도 한국관광공사는 조용하다. 관광 홍보를 담당하는 공공기관으로서, 국민이 위험에 처했을 때 보여야 할 대응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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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의 홍보실은 그동안 ‘국가 이미지를 세계에 알린다’는 명분으로 막대한 예산을 써왔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공사는 69개의 SNS 채널을 운영하며 연간 41억 원을 집행하고 있다. 이 중 유튜브 ‘Imagine Your Korea’에는 21억 원, ‘히얼위고 코리아’에는 2억 3800만 원, ‘한국관광공사TV’에는 1억 4375만 원이 각각 투입되었다.
그러나 실효성은 미미했다. 일부 채널의 구독자는 1만 명에도 못 미치고, 콘텐츠 조회 수는 예산 규모에 비해 초라하다. 이런 구조적 낭비에도 불구하고, 국민 안전이나 위기 커뮤니케이션 관련 사업은 공백 상태다.
더 큰 문제는 예산 배정의 불투명성과 반복되는 편중 계약이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9년간 특정 업체에 약 279억 원을 수의계약 형태로 몰아줬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한 ‘열린관광 모두의 여행’ 홈페이지를 구축하며 10억 원을 투입했지만, 등록된 관광 콘텐츠는 132건에 불과했다. 이미 ‘대한민국 구석구석’이라는 포털을 운영하고 있음에도 별도 사이트를 만든 이유는 여전히 의문이다. 여기에 ‘메타버스 홍보관 구축 사업’에 7억 원을 들이고도 월 접속자 수가 9명이라는 황당한 결과가 보도되면서, ‘혁신’이란 이름의 형식적 사업이 세금을 갉아먹는 구조가 드러났다.
이런 문제는 단지 홍보 부서의 일탈이 아니다. 공사의 존재 목적이 ‘관광산업 진흥’이 아닌 ‘이미지 소비’ 중심으로 기형화된 결과다. 외국에서 한국인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국민을 보호하고 여행 안전망을 강화하는 시스템은 부재하다. 대신 공사는 국가 이미지를 미화하는 광고 캠페인에 집중한다. 대표적으로 ‘Feel the Rhythm of Korea’ 영상 홍보에만 약 124억 원이 투입되었는데, 그중 광고비 비중이 80%를 넘었다.
성과보다 숫자에 집착하는 홍보 중심 체계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캄보디아 대학생 살해 사건은 이런 왜곡된 구조의 민낯을 드러냈다. 정부는 긴급 대응 TF를 꾸리고 대통령까지 “가용 자원을 총동원하라”고 지시했지만, 한국관광공사는 단 한마디의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국민이 외국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한국의 아름다움’을 홍보하는 기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구조적 기능 상실이다.
이제 제도 개편이 불가피하다. 첫째, 홍보 기능을 대폭 축소하거나 민간에 위탁해야 한다. 공사는 거버넌스·브랜드 전략·관광정책 조율에 집중하고, 콘텐츠 제작·채널 운영·광고 집행은 민간 전문기업에 맡겨야 한다. 둘째, 예산 투명성과 외부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 예산 항목을 세분화해 공개하고, 국회 예비심사와 외부 감사가 가능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셋째, 재외국민 보호 기능을 강화한 ‘국민 안전센터’ 신설이 필요하다. 해외 여행 중 발생하는 사건·사고 대응, 현지 경찰·외교당국 협력, 여행경보 체계 등을 실질적으로 담당할 수 있는 구조가 공사 내부 또는 별도 조직으로 마련돼야 한다.
캄보디아 사건은 공공기관의 홍보 중심 구조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여준 결정적 사례다. 수십억 원짜리 광고보다 중요한 것은 한 명의 국민 생명이다. ‘국가 브랜드’는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 국민을 지켜내는 행정으로 증명된다. 지금 한국관광공사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슬로건이 아니라 근본적인 개혁이다. 홍보의 껍데기를 벗기고, 국민을 위한 공사로 다시 서야 한다. 그것이 진짜 ‘대한민국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