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페루의 수도 리마는 남미 여행의 첫 출발지로 가장 완벽한 도시다. 잉카 문명의 유산과 스페인 식민지 건축, 그리고 활기 넘치는 현대 도시의 풍경이 공존하는 이곳은 여행자를 단숨에 매료시킨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약 24시간, 드디어 남미의 관문인 ‘호르헤 차베스 국제공항(Jorge Chávez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느껴지는 이국적인 공기, 조금은 거칠고 열정적인 남미의 리듬이 나를 반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서 시작하는 역사 도보 여행
리마 대성당(Catedral de Lima) (사진=픽사베이)
리마 여행의 시작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지 ‘센트로 히스토리코’다. 이곳 중심에 위치한 리마 메인광장(Plaza Mayor)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시를 설계할 때 가장 먼저 선택한 지점이자 지금도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다. 광장을 둘러싸고 리마 대성당(Catedral de Lima), 페루 대통령궁(Palacio de Gobierno), 시청사가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 내부에는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무덤이 있으며, 리마 메인광장(Plaza Mayor) 정중앙에는 웅장한 리마 대성당(Catedral de Lima)과 바로크 양식의 페루 대통령궁(Palacio de Gobierno)이 자리한다. 오전 11시 45분경부터 시작되는 교대식은 매일 볼 수 있는 볼거리이지만, 정식 승마 근위병대가 참여하는 기수 교대식은 매월 1·3주 일요일에만 열리며, 그 외 토·일요일에는 비승마식 교대식이 진행된다. 방문 시 미리 일정 확인을 하는게 좋다.
리마 메인광장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는 ‘산 마르틴 광장(Plaza San Martín)’이 있다. 이곳은 페루 독립운동의 영웅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을 기리는 기마상이 중심에 서 있고, 주변에는 아르누보 양식의 극장과 호텔들이 둘러싸고 있어 과거의 영화로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산프란시스코 교회의 정면 (사진=셔터스톡, 페루관광청)
수도원의 지하묘지, 카타쿰바스,(사진: 페루관광청 José Orihuela/PromPerú)
산프란시스코 수도원(Monasterio de San Francisco)의 지하 납골당은 일반적으로 ‘카타콤’이라 불리지만, 정확한 명칭은 ‘카타쿰바스(Catacumbas de Lima)’로,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대규모 지하 납골묘이다. 현재는 흥미로운 오싹함과 역사적 깊이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박물관 형태로 공개 중이다.
◈미라플로레스, 리마의 감성적 얼굴
말레콘(사진=픽사베이)
리마의 또 다른 매력은 태평양과 맞닿은 지역 미라플로레스에서 펼쳐진다. 해안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 말레콘(Malecon)은 아침 러너들과 일몰을 기다리는 연인들이 어우러진 낭만의 공간이다. 말레콘 한편에 위치한 ‘사랑공원(Parque del Amor)’에서는 거대한 연인의 조각상이 바다를 등지고 서 있고, 알록달록한 모자이크 벽은 바르셀로나의 구엘공원을 연상시킨다.
와카 푸크야나 유적(Huaca Pucllana)(사진=페루관광청)
도심을 걸으며 만난 와카 푸크야나 유적(Huaca Pucllana)은 마치 도시 한가운데에 성스러운 시간의 계단을 세워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유적은 잉카 이전 리마 문명의 피라미드형 제단으로, 어도비(손으로 빚은 진흙벽돌)와 점토(brick clay)를 쌓아 만든 구조다. 높이 22~25미터에 이르는 피라미드는 일곱 겹의 층으로 이루어졌고, 외부는 광장과 제의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1500년 전의 신전과 의례 공간이 현대 도심 속에 고요히 서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 이상의 경외감을 자아낸다. 이곳을 둘러싼 빌딩 숲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존재하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또 한편에는 고대 구조를 내려다보며 식사할 수 있는 세련된 레스토랑이 있어, 유적의 무게감과 현대의 감각이 한 테이블에 공존하는 특별한 체험을 제공한다.
‘케네디 공원(Parque Kennedy)’은 길거리 예술가와 고양이로 유명한 미라플로레스의 중심공원이다. 저녁이면 버스킹 공연과 거리 음식 냄새로 가득 차며, 인디언 마켓(Indian Market)에서는 페루 전통 직물, 수공예 은세공품 등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바랑코의 심장, 한숨의 다리에서 멈춘 시간
한숨의 다리(사진=페루관광청-셔터스톡)
리마에서 가장 낭만적인 장소를 단 한 곳만 꼽아야 한다면, 주저 없이 바랑코(Barranco)의 ‘한숨의 다리(Puente de los Suspiros)’를 떠올릴 것이다. 보헤미안 감성이 물씬 풍기는 이 지구의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정교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목조 보행자 다리가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온다. 높이 8.5m, 길이 44m, 너비 3m의 아담한 이 다리는 1877년, 협곡 양쪽을 연결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지금은 수많은 전설과 시, 노래의 배경이 되는 리마의 상징이 되었다.
‘한숨의 다리’라는 이름에는 로맨틱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처음 이 다리를 건너는 순간 말을 아끼고 한숨만 내쉬면, 간절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많은 연인들이 이 다리를 함께 걷고, 소원을 속삭인다. 그리고 시간이 멈춘 듯한 그 순간, 사랑이라는 단어가 리마의 공기를 더욱 따뜻하게 만든다.
다리 주변 역시 놓치기 아까운 명소들로 가득하다. 다리 끝에는 18세기 중반에 지어진 ‘라 에르미타 예배당(La Ermita)’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된 이 작은 예배당은, 붉은 벽과 낡은 종탑이 어우러져 바랑코만의 정취를 더한다.
바로 근처 언덕 아래에는 ‘차부카 그란다 기념비’가 있다. 페루의 전설적인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그녀는 이 다리를 배경으로 왈츠 “한숨의 다리(Puente de los Suspiros)”를 탄생시켰고, 그 음악은 바랑코를 사랑의 공간으로 남게 했다.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호세 안토니오”는 지금도 광장에 울려 퍼지며 바랑코의 밤을 감싸 안는다.
다리 아래로 이어지는 좁은 길, ‘바하다 데 로스 바뇨스(Bajada de los Baños)’는 또 다른 이야기의 무대다. 자갈이 깔린 길을 따라 오래된 주택과 예술가들의 작업실, 개성 있는 바와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다. 어느 곳을 들어가도, 음악과 미술과 와인의 향이 오롯이 묻어난다. 여행자는 이 거리에서 예술을 걷고, 시간을 마신다.
리마에서 하루를 보낸 여행자가 마지막으로 도달해야 할 곳은 어쩌면 이 다리일지도 모른다. 낡은 나무판을 밟는 사각거림,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숨죽인 사람들, 그리고 다리 아래로 스르륵 내려앉는 노을.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한숨 대신 미소가 절로 새어 나오는 순간. 한숨의 다리는 그렇게, 여행자의 마음에 작고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바랑코와 미라플로레스를 연결하는 해안 아래, 코스타 베르데(Costa Verde) 해변에서는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함께 서핑을 즐긴다. 리마는 생각보다 서핑 천국이기도 하다.
◈문화의 깊이를 더하는 박물관 산책
리마 박물관(사진=페루관광청)
리마는 고대 문명을 간직한 박물관의 도시다. ‘라르코 박물관(Museo Larco)’은 잉카 이전 문명부터 식민지 시대 유물까지 전시하며, 에로틱 도자기 컬렉션으로도 유명하다. 이어 ‘국립고고학·인류학·역사박물관’과 ‘리카르도 팔마 박물관’에서는 페루 민속과 문학, 근대사의 흔적까지 만나볼 수 있다.
◈리마 미술관, 시간의 붓으로 그려낸 페루 미술사의 흐름
리마 말리 미술관(사진=페루관광청-셔터스톡)
리마의 예술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싶다면, ‘MALI’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리마 미술관(Museo de Arte de Lima)을 놓쳐선 안 된다. 리마 중심부 파르케 데 라 엑스포지시온(Parke de la Exposición) 내에 자리한 이 미술관은 페루 독립 50주년을 기념해 지어진 전시 궁전으로, 절충주의 양식의 웅장한 외관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서 깊은 이 건축물은 단순한 미술 전시 공간을 넘어, 리마의 근대사를 고스란히 품은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총 4,500㎡에 달하는 전시 공간은 상설 전시관과 임시 전시관으로 나뉘며, 소장품만 해도 무려 17,000점에 달한다. 이 중 1,200여 점의 작품이 상설 전시관에 소개되는데, 전시 구성은 페루 미술사의 흐름을 시대별로 정리한 구조다. 콜럼버스 이전의 토착 예술부터 정교한 직물과 식민지 시대의 종교 미술, 은식기와 공화정기의 초상화, 그리고 20세기 사진·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3,000년의 미술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미술관은 전시 외에도 시민 참여형 문화 활동이 활발하다.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참여할 수 있는 시각 예술 수업, 신체 표현 워크숍, 댄스·에어로빅·기타 강좌가 진행되며, 관람 후에는 영화 자료실에서 페루 영화를 감상하거나 고풍스러운 카페테리아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즐길 수 있다.
◈하루 세 끼로 부족한 미식의 도시
세비체(사진=픽사베이)
리마에서의 하루는 ‘어디를 갈까’보다 ‘무엇을 먹을까’로 시작된다. 남미의 미식 수도라 불리는 이 도시는, 그 명성처럼 하루 세 끼조차 모자랄 정도다. 신선한 생선살에 라임즙을 더한 세비체(Ceviche) 한 접시로 아침 입맛을 깨우고, 점심엔 안데스 지역 특산 옥수수와 함께 나오는 안티쿠초(Anticucho, 소고기 꼬치)를 시도해 본다. 해질 무렵, 부드러운 닭고기와 고소한 고추 크림소스가 어우러진 아히 데 가이냐(Aji de Gallina) 한 그릇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야말로 리마식 ‘완벽한 하루’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친 여행자들에게 리마의 밤은 ‘매직분수공원(Circuito Mágico del Agua)’에서 빛난다. 13개의 분수가 음악과 조명을 따라 춤추는 이곳은 가족 단위 여행객뿐 아니라 연인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다. 특히 터널처럼 이어지는 물줄기를 걷는 체험은 이색적이다.
매직분수(사진=셔터스톡)
단 하루였지만, 리마는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 바다와 식탁, 고요와 열정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기억될 목적지’로 충분한 이곳. 리마는 남미 여행의 첫 사랑 같은 도시다.
( 다음 편에서는 잉카 문명의 심장, 쿠스코와 마추픽추를 중심으로 ‘고산의 유산’을 따라가는 여정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