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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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포에라를 연습하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

   
해변에서 멋지게 공중제비돌기를 하며 카포에라를 시연하고 있는 청년.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무척 즐거워 보인다.

 

 

 

 

 

 

 

 

 

 

 

 

 

 

 

약속 장소에 흑인여인은 혼자 나온다. 친구는 잠시 뒤 해변으로 바로 나온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해변으로 가니 위아래로 끝없이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그 가운데로 포르투갈 시대의 요새 건물이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서있다.

   
내 옆에서 스스럼없이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여인이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며 서 있다.
파라솔과 해변용의자 두 개를 빌려 바다를 바라보고 앉는다. 여인은 바로 옆에 서서 전혀 스스럼없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는 책을 꺼내 읽는다. 얕은 바다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백사장에서는 청소년들이 카포에라를 연습한다. 물에 젖은 검은 피부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게 무척 아름답다. 흑인의 피부가 아름답다는 걸 새삼 발견한다.

눈이 시리도록 바다를 바라보다가 숙소 부근으로 돌아와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값싼 뷔페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공연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여인과는 헤어진다. 해변으로 나온다던 춤추던 여인은 우리가 해변을 떠날 때 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 여인은 의외로 순수한 느낌을 풍긴다.

공연장에는 어제와 다른 백인 공연단이 음악을 연주한다. 사람들이 공연장으로 몰려든다. 또다시 광란의 밤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맥주 캔을 들고 몸을 흔들거리는 사이에서 흑인여인을 다시 만난다. 여인은 그새 파티용으로 옷을 갈아입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까지 칠했다.

나는 다시 어제의 계단에 앉아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여인은 내가 춤도 추지 않고 맥주도 마시지 않으니 재미가 없는지 어제의 친구를 찾아간다.

어제의 맥주 한 모금으로 작업을 하던 사내가 오늘도 맥주 캔을 들고 바깥에 홀로 서있는 여인들 사이를 돌아다닌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처럼 쉽지 않은지 다 마신 맥주 캔을 계단에 올려두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날마다 장날은 아니다.

이튿날은 100미터쯤 아래 있는 신시가지로 ‘라세르다’라는 대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섬으로 가는 유람선 선착장과 관광 기념품들을 파는 유럽식 상가들이 있는 거리다. 그 위쪽의 성당이 즐비한 거리와 함께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정한 곳이다.

바닷가 선창에서는 갓 잡아온 40~50센티미터의 상어들을 머리를 잘라내고 몸통만을 도매상에게 넘기고 있다. 우리네는 어두일미라고 생선의 머리가 맛있다고 여기는데 여기서는 상어의 머리를 버린다.

광장의 전망대부근을 거닐다가 어제의 흑인여인를 다시 만난다. 여인이 반색을 하며 말한다.

“어제 금방 다시 공연장으로 갔는데 없어졌대? 한참 찾았는데.”

그녀와 함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선다. 도시의 불빛과 바다에 떠있는 배들의 불빛이 반짝인다. 가까운 바다에서 거대한 유람선 한 척이 수많은 불을 밝히고 서서히 지나간다.

여인이 오늘은 말을 많이 한다. 그녀는 브라질 내륙의 어느 곳에서 친구를 만나러 이곳에 왔는데 곧 떠날 거라고 한다. 친구가 급한 일로 어제 어디로 출장을 가서 혼자 남았다는 거다. 이런 말끝에 여인이 내 팔을 잡으며 웃지도 않고 한마디를 한다.

“오늘 밤 함께 잘 수 있을까?”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 뭐라고?”

“오늘밤 당신이랑 함께 지내고 싶어.”

당황스럽다. 이 여인이 돈을 원하는 건 아닐까?

내가 대답을 못하고 눈을 멀뚱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자 여인이 다시 말을 잇는다.

“아니, 그냥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

이 여인은 내일이면 내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닷가에서부터 내가 말했기 때문이다. 여인의 말에 진심이 어려 있다. 일시적인 농담이나 돈을 원하는 유혹은 절대 아니다. 그러기에는 여인의 얼굴이 너무나 담담하고, 조금은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더욱 혼란스럽다. 이번 여행길은 나름대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떠나왔다. 이전의 여행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심장부인‘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의 산꼭대기에서 탑까지 쌓아놓고 소원을 빌지 않았는가?

‘바라옵건대 부디 저를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저 낮은 욕망으로부터 건져내 주시옵소서.’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빙빙거리며 돌고 있다.

“이따가 저녁에 어제 그 노천 바에서 만나자.”

시간을 좀 갖고 싶다. 시간을 두고 머리를 정리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다. 바로 거절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내 더운 피가 아직은 정확히 마음을 정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여인과 헤어져 중심가에 있는 국제여행자용 은행에서 얼마의 돈을 인출한다. 내일부턴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기에 미리 편한 곳에서 얼마간 쓸 돈을 인출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 저녁에 파티장엔 나가지 않기로 결심을 했지만 아직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이 돈을 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의 경우 쓸 돈은 필요하다. 주머니엔 잔돈 얼마만이 달랑 남아 있었다. 그런데 기계가 한 번에 작동하지 않아 지키고 선 경관의 도움을 받아 두 번째에야 돈을 인출할 수 있다.

바로 옆의 기계에서는 유럽인 노인 한 분이 현지인 청년 두 명의 안내를 받으며 돈을 인출한다. 그러나 비밀번호를 누를 때가 되자 노인은 현지인들을 물러서게 하고 손바닥과 온몸으로 번호판을 가린다.

노인의 그 모습이 지나칠 만큼 철저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로부터 두 달 뒤 베네수엘라에서 나는 한국으로부터 경악할 소식을 접하게 된다. 누군가 내 카드를 복제해 내 통장의 돈을 모두 인출해갔다는 것이다. 그 사고의 근원지가 이곳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기적으로 이곳이 누군가 내 카드를 복사한 유력한 장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돈을 뽑고 나니 결심이 단호해진다. 그래서 여자를 만나러 파티장으로 가는 대신 우연히 만난 스위스인 남자 여행자 둘과 함께 숙소 옆 노천 바에서 동이 터올 때까지 술을 마신다. 지난 열흘간의 금주가 깨어지는 순간이다. 술잔을 드는 손에 점차 가속이 붙는다.에게 미안하다.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처신한 내 행동이……. 스위스인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통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바라보며 나의 마음은 아쉬움을 길게 끌며 그녀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광장의 걸인들조차 춤을 추며 구걸을 하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도 몸을 흔들며 춤을 추듯 걸어가는 살바도르는 검은 힘으로 넘치는 흥겨운 축제의 도시다.

하지만 나는 바로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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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라틴아메리카'-브라질'살바도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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