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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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아이=최치선 기자] 111년 만에 최악의 폭염이 찾아왔다. 서울이 열사의 나라 중동과 같은 기온을 기록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회에서도 뒤늦게 폭염을 재해에 넣겠다며 비상이 걸렸다. 거리에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폭염이 절정이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이 빙하의 나라로 휴가를 가야 할 판이다.  


건강이 염려되는 이 때 바다나 계곡으로 온 가족이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다. 자가용이 없다면 렌트를 해서 불교와 유교의 전통이 공존하는 경북 영주로 문화유산답사를 떠나보자.  영주에 가면 우선 유물과 유적이 많아 눈으로 보면서 역사공부도 하고 소백산국립공원이 지척에 있어 휴식을 취하면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기 그만이다. 물론 먹거리도 풍부하다. 풍기인삼, 영주사과, 순흥복숭아, 단산포도, 영주문어, 영주한우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부터 1박2일로 영주문화유산답사를 시작한다. (사진= 최치선 기자) 

   



이번 답사에서는 유교부흥정책에 희생된 신라고찰 숙수사재건의 필요성을 살펴보고 소수서원, 소수박물관, 금성대군신단, 선비촌, 선비수련원, 순흥도호부, 무섬전통마을, 부석사 등 영주와 풍기 일원의 유적 및 문화유산을 둘러본다.


소수서원 - 숙수사 절터에 세워진 조선시대 최초의 사립대학
▲ 백운동

지금의 영주시는 옛 영풍군이 위치했던 지역으로 영천군(榮川郡)·풍기군(豊基郡)·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합해 이루어진 곳이다. 영풍은 영천과 풍기의 머리글자를 따 이름 지어졌다. 영주문화유산답사의 시작은 순흥도호부가 있던 조선시대 최초의 사립대학인 소수서원에서 출발한다.

▲ 숙수사 당간지주

현재의 소수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가 세워져 있던 곳이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서원 입구에는 4m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있어 숙수사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소수서원은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평소 자신이 흠모해 왔던 고려 유학자 안향의 연고지인 이곳 풍기 땅에 부임한 후 안향의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사당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을 마련하면서 서원으로서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서원의 시설을 정비한 주세붕은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다. 또한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서당(白雲洞書堂)이라고 하였다가, 중종 40년(1545년)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補)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 소수서원 강학영역

주세붕이 처음 서원의 터를 닦은 뒤, 안향의 후손으로 경상감사로 부임한 안현은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를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 어염(魚鹽) 등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운동 서원이 보유한 전답 30결(9만 평)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다. 

▲ 소수서원 지도문

이후 조선 명종 5년(1550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는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篇額)을 서원에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내렸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 취한대
▲ 소수서원 전경 (사진=최치선 기자)

이는 사액서원의 시초로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되었다. 사액된 뒤 입학 정원도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또한 서원의 원생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은 서원에서의 학업 규칙도 정해 배움의 장으로서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자들이었고,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 곧바로 퇴원당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천 명에 달했다.


소수박물관 - 국내 유일의 유교박물관 체험

▲ 소수서원 안내판
▲ 소수박물관에 전시된 숙수사 유물
▲ 소수박물관에 전시된 숙수사 유물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해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 소수박물관에 전시된 숙수사 유물인 용두

이곳은 조선유학의 메카답게 서원과 관련한 귀중한 문화유산과 유학의 전망를 눈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유교박물관이다. 소수박물관은 2004년 9월 22일 개관을 시작으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전시 중이다.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석사 -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확인하는 특별한 시간여행 

▲ 부석사

부석사는 영주시 소백산 국립공원의 봉황산에 위치한 화엄종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승려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나 흥교사로도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공민왕 21년(1372년)에 주지가 된 원응국사(圓應國師)에 의해 크게 증축되었다. 한국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중 하나인 무량수전과 조사당 또한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평지가람과 달리 산지가람이며, 보다 더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와 조선시대로 갈수록 점점 심해진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부석사

현재 부석사는 전성기의 모습이 아니다. 문헌과 그림등에 나온 과거의 가람 구조가 현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1840년에 발간된 ‘순흥읍지’에는 10세기 중반 부석사의 모습이 적혀있는데 지금은 없어진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 - 수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목조 건축물

▲ 무량수전

부석사에는 몇 안 되는 고려 시대 건축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이 유명하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중기의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은 무량수전외에 봉정사 극락전과 수덕사 대웅전이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한국 건축의 구조미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무량수전은 한국 건축의 형태, 비례미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받고 있다. 순수하게 건축물로써의 완성도를 본다면 무량수전이 더 급이 높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현재까지 창건 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 부석사 석등 (사진=최치선 기자)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무량수전은 조선시대 건물과 비슷해보이면서도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창호의 배치가 다르다. 원래 고대 건축인 삼국시대 건물에는 창호가 없었다. 당시에는 종이(한지)는 매우 소량 생산되던 것으로, 그 자체가 매우 비싼 귀중품이었기 때문에 창에다가 종이를 붙이는 것은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천이나 대나무 발 등으로 막아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세인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창호란 단어와 함께 종이를 창문에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이 무량수전의 창호의 그 당시로써는 꽤 최신식이며, 고급스러운 장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창호의 살 형태도 가장 기초적인 정자살이란 것을 알 수 있다.

▲ 부석사 5층석탑

조선시대로 가면 16세기부터 한지가 대량생산되어 창호가 일반 가정에도 보급이 되며, 절의 창호 역시 각종 장식이 붙게 된다. 무량수전의 기둥 사이의 창호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좌 우 양 쪽의 창호는 창문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들어올리는 방식으로 열리며, 가운데 두짝의 창호는 문으로 기능하기에 좌우로 열리는 여닫이 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부 여닫이인 동시에 창으로 들어올리는 4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한가지는 무량수전은 원래 입식용 건축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무량수전 실내에 있는 나무 바닥 아래에는 원래 녹색의 유약을 칠한 벽돌인 녹유전이 깔린 바닥이 있다. 즉, 고려시대에는 마치 중국의 건축물처럼 사람이 신발을 신고 서서 지내는 입식생활이 일반적이었고, 무량수전 역시 그러했다는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온돌 등 때문에 좌식생활이 일반화되고, 절에서는 엎드려서 절을 하는 것이 널리 퍼지자 새로 나무 바닥을 깔게 된 것이다. 부석사 안의 박물관(유물관)에 녹유전을 재현해 놓았다. 녹유전은 유리같이 광택이 뛰어나며, 이는 불국토의 수미산 바닥이 유리로 되어있다는 말을 형상화 한 것이다.

▲ 부석사 '안양루'
▲ 안양루

부석사를 이야기할때 빠질 수 없는게 '누하진입'이다. 누각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안양루 밑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천장(안양루 바닥)에 시야가 가려지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낮추며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의 진신이 모셔져 있는 탑이나 서방극락세계를 뜻하는 무량수전에 몸을 낮춰 겸손함을 저절로 보이게 되는 구조다.
무량수전 내부 아미타여래상은 왼편에 위치해 있는데, 무량수전이 바라보는 방향이 남쪽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미타여래는 서쪽(극락세계)에서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선비촌 - 유교사상과 생활상을 체험하는 교육장

▲ 선비촌

선비촌은 유교문화 발상의 중심지로서 옛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선현들의 학문 탐구와 전통생활 모습 재현을 통해 관광자원화 등 미래지향적인 관광 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며, 우리 전통적 고유사상과 생활상의 체험 교육장으로 활용가치가 높다.


또한 선비촌은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기리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해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효의 현장에 재현한 것이다. 앞으로 소수서원과 연계되는 영주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그리고 역사관 확립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될 것이다.

선비촌은 802평의 규모에 와가 7가구, 초가 5가구, 누각 1동, 정사 2동, 정려각 2동, 성황당 1동, 곳집 1동, 원두막 1동, 저자거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성대군신단 - 단종 복위 위해 희생된 금성대군과 순절한 의사를 기리는 제단
영주 금성대군 신단(사적 제491호)은 조선 세조 때 단종임금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이름 瑜, 세종임금의 여섯째 아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의 넷째동생)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그 일에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들을 제사 드리는 곳이다. 조선 세조 원년(1455)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일파는 금성대군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워 삭령(朔寧)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移配)시켰었다. 이듬 해 성삼문 (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이 상왕 복위운동에 실패하여 참혹하게 희생되자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 대군은 다시 이곳 순흥으로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금성 대군은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의기가 통하여 단종복위를 위한 격문을 짓게 하여 은밀히 순흥고을로 모여들게 하였다.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임금 복위를 꾀하는 거사가 무르익어가던 세조 3년(1457) 가을 어느날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 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 (廢府)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숙종 9년(1683)에 순흥은 명예가 회복되고, 이어 숙종 45년(1719) 고을사람 이기륭(李基隆)이 부사 이명희(李命熙)에게 알려, 단소(壇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금성대군 신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沈聖熙)의 소청에 의하였으며, 단소를 정비하고 중앙에 금성대군 위(位), 오른쪽 편에 부사 이보흠 위(位), 왼편에 무명 의사 위(位)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숙수사 - 유교정책에 희생된 비운의 고찰

▲ 소수서원에서 출토된 숙수사 유물

숙수사는 현재의 소수서원에 세워졌던 절로 1300년 경 폐사된 통일신라 고찰이다.
이후 방치된 숙수사는 1967년 출가한 백재 주지스님께서 그곳 고승의 은덕을 갚기 위해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 487-1번지에 2009년부터 현재까지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 숙수사 복원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숙수사 백재 주지스님(좌), 택견을 가르치고 있는 김순임 선생님(우)

백재 주지스님은 불교에 입문하기 전부터 청송교도소 및 여러 교도소에서 38년 동안 교화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안동교도소의 교도복지를 위하여 매월 첫째 주 수요일 방문하여 수감자들을 교화하고 있다.
지역 활동으로는 지역환경시설 현대화를 위해 경북도청을 한옥으로 건설할 것을 제안했고, 농촌지역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황토방 쑥뜸 방을 만들어 놓고, 무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스님들과 신도를 봉사자로 운영하고 있으며, 휴식 후에는 건강을 회복한 사례가 많아, 더 많은 지역민들이 쉴 수 있도록 시설확충 계획 중이다.
백재 주지스님은 지신행전(智信行傳)인 바로알고, 바로 믿고, 바로행동하고, 바로전하는 육체건강, 정신치료에 도움을 주고 있다.


숙지사지 - 소수서원의 천덕꾸러기가 된 숙수사 유물들

▲ 소수서원에서 출토된 숙수사 유물
▲ 숙수사 유물들

소수서원에 세워졌던 숙수사는 아직도 언제 세워졌는지 그리고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고 있다.
출토유물을 통해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기록으로나마 숙수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경남 산청 지곡사 진관선사비(981년(경종6년))에는 “정종(定宗) 문명대왕(文明大王)이 흥주(興州) 숙수선원(宿水禪院)에 주지(住持)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선사는 사생(四生)들에게 약석(藥石)을 베풀어 모두에게 치료하기 어려운 침아병(沉痾病)을 낫게 하였으며 육로(六路)에 다리를 놓아 모두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하였다.

임경식묘지명(林景軾墓誌銘) (1161년(의종15년)에는 “둘째 유승(惟勝)은 머리를 깎고 중대사(重大師)로 숙수사(宿水寺) 주지로 있다.”
숙수사의 폐사 원인에 대해 고려 고종때 몽고의 침략을 드는 경우도 있지만 안향(1243~1306)이 어린 시절 수학하였고 훗날 아들과 손자인 안목(1360년 卒)도 숙수사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1231년 시작된 몽고침략 이후에도 사찰이 존속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숙수사는 언제 폐사가 되었을까. 숙수사는 현재까지의 문헌자료를 토대로 폐사연대를 추정해본 결과 1358년 부석사 무량수전이 적병화(敵兵火:倭寇)로 소실될 당시에 함께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1543년 주세붕이 백운동서원(퇴계 이황이 소수서원으로 만듬)을 세울 당시 이미 숙수사는 폐사가 된 상태였다.

이후 숙수사는 앞서 소개했듯이 800년 가까이 방치되어 오다가 백재 스님에 의해 재건되고 있다. 하지만 눈으로 보여지는 숙수사의 유물은 지금도 정부의 손을 벗어나 있다. 

당간지주만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나머지 숙수사의 석조유물들은 여전히 소수서원 곳곳에 제멋대로 방치된 상태다.
서원내부를 둘러보다 보면 목탑의 심초석과 둥근 원형 안에 사각형의 찰주공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그곳이 숙수사의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더 훼손되기 전에 발굴과 보존이 시급하다.

지금은 소수서원이 역사적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여기는 엄연히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소수서원만 문화재가 아니라 그 땅에 원래부터 있던 숙수사의 모든 흔적들 또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문화재청 관계자들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수도리 전통마을(영주 무섬마을) - 느림의 미학과 수백 년 전통이 오롯이 남은 집성촌

▲ 무섬전통마을

3면이 물 위에 둘러싸인 섬이라 하여 ‘무섬마을’이다. 문수면 수도리 전통마을로 불리던 이 곳은 마을 주변을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휘돌아 흐르는 대표적인 물동이마을이다. 

▲ 무섬마을 안내도

무섬마을의 역사는 166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남(潘南) 박씨인 휘(諱) 수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후 선성(宣城) 김씨가 들어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있다. 현재는 박씨보다 김씨가 더 많다.
40여 가구 전통가옥이 지붕을 맞대고 오순도순 마을을 이루는 무섬마을은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이 오롯이 남아있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 해우당고택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가 마을에 들어와 건립한 만죽재(晩竹齎)를 비롯해 총 9개 가옥이 경북문화재자료 및 경북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역사가 100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남아있어 조상들의 자취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해우당(도 민속자료 제92호)과 만죽재(도 민속자료 제93호)는 옛 선비들의 단아한 격식이 느껴지는 고택이다. 이처럼 유유히 흐르는 강과 정겨운 자연 속에 고풍스러운 옛집이 즐비한 수도리는 고향을 찾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기에 좋은 곳이다.

또한 마을 내 고택과 정자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고풍스런 옛 향취를 풍기고, 30년 전까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 외나무다리가 마을의 대표 상징물로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 무섬외나무다리 (사진=최치선 기자)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에는, 휘감아 도는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맞은편에는 소나무, 사철나무 등이 숲을 이룬 나지막한 산들이 강을 감싸 안고 이어진다. 또, 강 위로는 견실한 다리가 놓여져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다. 수도리는 고택과 정자로 이루어진 전통 마을로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잔잔한 강물 위에 세워진 무섬외나무다리를 천천히 걷다보면 어른들은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좁은 나무다리 중간 중간에는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을 피해 자리를 내줄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외나무다리는 중심을 잡으며 걸어야 되기 때문에 느림의 미학을 체험하게 되고 발아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자연과의 일체감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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