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인권의 날 기념 칼럼] 恨 많은 영혼을 잠재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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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날 기념 칼럼] 恨 많은 영혼을 잠재우다

기사입력 2016.12.0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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恨 많은 영혼을 잠재우다 
글/록원 강창석,  그림/ 영매화 김미경


12월10일은 인권의 날이다. 인권은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권리를 뜻한다. 하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차별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그 중 소록도 나병환자들에게 가해진 차별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인권의 날을 맞아 인권을 유린 당한 채 수많은 시간을 살아 온 소록도 나병(한센병)환자들의 애환을 록원 강창석 시인의 글을 통해 살펴보았다. 

한센병역자인 강창석 시인은 소록도에 거주하며 피눈물 나는 인권유린 현장을 시로 승화시켰다. 소록도는 작은(小) 사슴(鹿)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졌다. 전남 고흥 반도 끝의 녹동항에서 배로 불과 5분 거리다. 지난 2009년 3월 3일에는 소록대교가 개통해 육로로도 오갈 수 있다. 우리에게 소록도는 한센병역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기원은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1910년 세운 시립 나요양원에서 시작되었다. 

 ‘한센병역자’는 병들고 싶어서 병든 게 아니었다. 세상태어나 성장하면서 엇갈린 숙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비언(飛言)도 많았었다. 1916년5월16일 일본천황 하사금으로 조선총독부는 해록(소록도 일컫는 말)에 ‘자혜의원’ 개원했었다. 

치료받는 중에 나균(癩菌)이 말초신경을 건드려 불구의 몸을 만들었다.불구가 된 한센병역자로서의 인간의 권리는 없었다. 식량이 부족하고 독한 약은 복용해야만 했으니 건강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처럼 언어에서부터 의식주, 문화까지 일본 문화로 적응하도록 강요받아야만 했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폭력에 시달려야만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붉은 벽돌 원토채취장에서 흙을 들판으로 운반해야만 했었다. 많은 남녀 인원이 동원되었다. 건조된 벽돌은 가마가 있는 중앙공원으로 운반해야만했다. 

가마에 넣은 벽돌은 삼일 동안 밤낮으로 불을 때 구워내야만 했었다. 여기서 만든 벽돌로 병원건물 짓는데 사용을 했다. 1935년 육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까지 강제노동 동원령이 내려졌었다. 선창 만드는 것부터 식량창고, 해변축대 쌓는데 간조(干潮)때 맞춰서 밤낮으로 일해야만 했었다. 공회당, 납골당, 교도소, 감금실, 등대 등 천여 명이 동원되어도 쉴 여가마저 없었다.

1936년 6월부터 중앙공원 만드는 곳에 주민 모두 동원되었다. 경사진 곳에 발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형벌처럼 느껴졌었다. 발바닥 궤양환자의 신발이 밀릴 때면 피부겉껍질이 밀려 궤양이 심하게 덧날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이 없는 사람은 연장을 손목에다 묶어서 일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나무를 심을 때마다 불구의 몸으로 힘들어했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호흡이 가빠질 때 입술로 타고 흘러내린 침이 구덩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기력이 떨어진 사람은 눈물을 쏟으며 일해야 했었다. 

일본인 감독관 눈에 거슬리면 감금실에 갇혀야만 했었기에 허리 펼 시간조차 없었다. 수십 톤이나 되는 바위는 완도 폐광에서 가져왔었다. 감독관이 바위 위에 서 있었으니 쉬라는 명령이 없으면 억지라도 끌어야만 했다. 공원 주위 조경은 완도 득량만 일대에서 채취한 바위는 목도로 가져온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에게는 가마니 짜는 틀을 집에까지 가져다주었다. 거동은 못하지만 손은 움직일 수 있으니 집에서 가마니를 짜게 했었다.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 나눔마저 할 수가 없었다. 

불편한 생활, 외로움 견디다 못해 부부 연(緣)을 맺을 수 있도록 일인 원장에게 요청을 하게 되었다. 원장의 대답은 남자들은 단종을 한 후 부부동거를 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관계에서 임신을 했을 때 강제 낙태수술을 당해야만 했었다. 결국 이러한 가혹한 학대와 처우에 불만을 품은 원생 이춘상(李春相)에게 4대 원장 스오 마사스에가 살해당했다. 

당시 한센병역자들은 일제의 강제 노동과 일본식 생활 강요, 불임 시술 등의 인권 침해와 불편을 수없이 당했다. 1939년 지역마다 일반인들에게 송진을 채취하도록 할당량을 주었었다. 소록도 주민에게도 예외 없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송치(소나무 속살)를 주었고 솔잎까지 주었던 소나무에게 송진까지 채취하라니... 하는 수 없이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채취해야만 했었다.

1945년 8월15일 그토록 몽매(夢寐)하던 해방을 맞았다. 5,00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 부르며 소록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기쁨도 잠시. 분노로 가득한 음성이 들렸었다. 각자 손에는 연장을 들고 단숨에 신사분소로 달려가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그 때 당했던 고통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트라우마 장애로 살아왔었다. 

아픔과 고통을 겪어봤기에 남의 아픔을 자신의 몸이 아픈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록도에서 살고 있다. 소록도 안에는 일제 강점기 한센병역자들의 수용 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록도 검시실, 감금실과 한센병 자료관, 소록도 갱생원 신사 등 일제 강점기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건물과 표지판 등이 많이 남아 있다.

검시실은 사망한 한센병 환자를 검시하는 해부실로 사용됐다. 현재 건물 안 내부에는 당시 검시대로 사용했던 차가운 흰 돌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고, 벽쪽으로는 수납장이 그대로 세워져 있다. 사망한 모든 환자들은 자신과 가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곳에 눕힌 채 꼼짝없이 해부당해야 했다. 그리고는 화장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됐다. 

이러한 일로 소록도 환자들은 '3번 죽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첫 번째는 한센병을 얻은 것이요, 두 번째는 죽은 후 해부당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장례 후 화장당하는 것이다. 감금실은 1935년 제정된 조선나예방령 규정에 의해 설치됐으며, 일제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이 되었다.

영매화 김미경, 해록의 진혼곡을 추며 완성한 문둥이 소나무

▲ 문둥이 소나무 (영매화 김미경 작)

6. 25전쟁 66주년을 맞아 버려진 유엔군제하의 영매화 시리즈를 작업하는 화가 영매화 김미경의 해원(解寃)’을 푼다. 김미경 화가는 지난 2012년 제73주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전으로 순국선열 추모 독립관 특별초대전을 가졌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의 그림소재는 영혼의 상생과 화해를 추구하는 영매화로 순국선열과 독립운동가의 작품이라 했었다.

첫 전시회가 순국선열주제였고 그 이듬해는 항일독립군 무명용사를 추모하는 그림. 다음에는 6.25 전쟁과 월남전까지의 호국영령을 위로 했었다. 이번작품은 6.25전쟁시 참전하여 산화한 유엔군 장병들과 진혼의 대화를 나누려 하고 있다. 모든 예술작품에는 작가가 원하는 것과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와 비의(秘意)가 숨겨져 있듯, 창작품에는 작가의 철학과 사상, 영혼까지도 다 녹아 있다는 뜻이다

김미경 화가는 번번이 그림의 소재는 해원(解寃)의 대상에서 찾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언젠가 소록도를 다녀가신 적 있다. 나의 안내를 받으며 섬 곳곳을 돌아보았다. 불쌍한 영혼들이 병든 것도 서러운데 강제노동까지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사참배 거부하는 환우에게 폭력도 주저하지 않았던 일인들...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무참히 개죽음을 당해야만 했던 슬픔도 알게 되었다. 아니 죽은 영혼과의 대화를 하는 듯 두 눈을 감은채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 있었다. 떠날 때 즈음 무언가 결심한 듯 말을 해주었다. 소나무 상흔을 가리키며 문둥이 소나무를 그리고 싶다라고 했었다. 난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론 기뻤다.

철학도 사상도 없는 한센병역자 작품을 누가 만들려고 하랴? 고향에서 버림받았고 일가친척에게서 매도당해야만 했었다. 그러한데 세상이 버리지 않으려 한다면 더 이상한 일이었던 것을... 아무도 생각이나 거들떠보지 않는 환우의 영혼을 위해 비의(秘意) 작품으로 그리려 하다니... 마치 나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감동과 함께 감개무량했었다.

 그리고 삼 개월 후. 난 화가의 공방을 지나치는 기회가 있었다. 연락을 드린 뒤 잠간 방문을 하게 되었다. 화가는 마침 화폭에 작품을 담고 있었다. 창작을 할 때면 침묵을 지켜주는 게 예의이기에 뒤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붓을 든 팔의 움직임이 마치 진혼곡에 맞춰 춤을 추는 듯했다. 힘주어 나는 듯 하다 사푼히 착지하는 듯. 섬세한 부분은 나비가 나풀거리는 듯 하고 있었다. 아픔과 고통 그리고 죽은 영혼들을 위해 진혼(鎭魂) 시키려는 듯 오랜 시간동안 한 몸이 되고 한 마음이 되어 함께 대화하며 승화(昇華)시키기 위한 그녀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자유와 평화를 수호했던 고인들 앞에 바치기 위해 언제나 쉼 없이 진혼의 춤을 추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었다.


문둥이 소나무

록원 강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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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에 나뭇가지가 떨고

검붉은 거친 껍질과 솔잎은

새벽이슬을 버겁게 마신다

휘어지던 가지가 꺾여 옹이가 박혀도 새싹이 돋듯

누더기 된 상처 아물지 않은 나인(癩人)의 역사를

새싹을 향해 써왔고 또 쓰고 있다

 

불구의 몸 학대당할까 봐 기꺼이 제 몸 회생시켜가며

배곯는 이에게 송치와 솔잎을 주면서까지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온 해록의 소나무여

너도 *나인(癩人)의 영혼이 아니겠느냐

 

단절과 압박 그리고 핍박과 탄압의 역사를

몸소 대변하듯 온전함이 없으나

숱한 한파를 잘 견뎌내어 새봄을 연 푸른 기상에

나인(癩人)의 영혼이 고스란히 열렸구나.

(*癩人한센병역자)

▲ 록원 강창석 시인이 소록도 자택에서 김미경 화가가 쓸 재료를 정리하는작업을 하고 있다.

당해 본 자의 피눈물이다

같은 울타리 안에 살면서 직원은 일반인 海鹿(소록도)주민은 癩人(한센병역자) 든게 죄라면 죄였었다. 묵은 상처 갈가리 찢겨 너덜거려도 가슴으로 보듬어 주려던 사람은 단 몇 사람 뿐. 인간의 권리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2002년 인권변호사가 海鹿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주민들이 들려주는 고통스러웠던 나날들... 세상천지 인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곳이 있다는 게 눈으로 상흔을 목격하여도 믿기지 않는 느낌이 들었나보다. 海鹿은 그 때부터 변화의 조짐이 시작되었고 주민은 구십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용의(儀容)를 갖추어 사람답게 살고 싶어 했었다. 

인권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당연히 인정된 기본적 권리를 갖는 게 인권이다. 근래 海鹿주민들이 유린당하신 분들의 배상소송 소식이다. 항소심 재판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강제성이 없었다.”라고 검사가 판시한 걸로 알려져 있다. 법리적 논리로는 맞는 말이다. 허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사과껍질과 같았었다.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기에... 강제성! 논리적으로 펼쳐놓으면 국립병원장은 정부서임명한사람이다. 당시 병원장 몰래 유린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 아니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마을사무소서 동거신청서를 올리면 의무적으로 단종을 해야만 했었다. 단종을 거부하면 지고지순한 사랑도 깨어져야만 했었다. 아니 가정은이루어지지 않았었다. 현장에서 억압받아야만 강제가 아니다란 뜻이다. 癩人의 상흔과 비교해보면 법리적 해석은 최소일 뿐이라 여겨진다. 당시 인권도 없이 무참히 짓이겨졌던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존엄함이 인권보장 못 받았을 때에... 트라우마 생긴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해보았을까. 

인간이 인간다운 권리마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민들이 눈물로 호소했던 권리를 누리려했던 게 海鹿주민 가운데 정부가 임명했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지켜주어야 할 존엄함. 그 기본이 보장 되었을 때 누구나 용의(儀容)를 갖추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인권 유린, 당해본 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피눈물이다.

 

록원 강창석

서라벌 문예: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협 고흥지부 부회장

선진문협: 선임 윤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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