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 전체메뉴보기
 


▲ 시간의 기억 15, 66*54cm 장지 채색


큐레이터와 통화를 마치고 서둘러 인사동으로 이동했다. 인터뷰는 주말보다 평일 전시회장에서 하는 게 좋다는 말에 약속을 잡고 가나인사아트센터로 출발한 것이다.

3
층 전시회장에 도착하자 큐레이터가 이형곤(50) 화가를 소개했다. “‘시간의 기억이란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는 이형곤 선생님이세요. 지난 10일부터 26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들 작품은 장지에 채색을 한 동양화들로 오래된 벽화의 느낌을 표현 한 것이 특징입니다.”

부드러운 인상의 화가는 자신을 소개하는 큐레이터의 말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이어 큐레이터의 소개가 끝나자 화가는 명함을 건네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 작품은 다섯 번째 개인전이고 시간을 주제로 작업을 한 것들입니다. 큐레이터 선생이 언급해 주신 것처럼 벽화의 느낌을 내려고 칠을 하고 다시 칠을 벗기는 작업을 내가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고조선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고대 벽화를 형상화 시켰죠.”

이형곤 화가는 밑그림 후 한 번의 채색을 통해 완성되는 동양화가 아니라 수십 수백 번 덧칠과 벗겨내기를 반복하면서 얻어지는 색으로 원하는 작품을 표현했다
.

이번 작품에는 꽃과 말과 새들이 등장합니다. 꽃은 시간을 형상화 했고 말과 새는 시간 속에 놓여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작품 속에 있는 꽃은 전부 칠이 벗겨져 있고 상처가 나 있습니다.”

작가는 굳이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았다
. 관람객들은 마치 오래된 벽화를 대하듯 그의 작품을 보게 된다. 고구려벽화가 수천 년을 여행한 후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처럼 시간의 기억연작들은 낯설지만 편안하다. 디지털시대에 고대 벽화의 재현으로 점점 무뎌지는 사람들의 아날로그 감성을 깨워준 것이다.

그는
우리가 감각하고 의식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존재로 인해 기능한다. 시간은 과거로부터 무수히 불규칙과 규칙으로 반복되는 일회성 사건들을 포용하며 망각하거나 복원하며 기억한다. 이것은 현재, 또는 미래라는 흐름으로 무한반복 되어간다. 무한반복의 시간성은 시간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의 실상을 무관심적이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것은 현재의 나로 하여금 과거로부터 기억된 흔적과 자취를 찾아 단편적이고 무의미한 주변적인 것에 집착하고 끊임없이 몰입해 들어가게 한다. 영원의 시간위에 잠시 다녀가는 이유를 찾기 위함이기도 하다고 작가노트를 통해 시간의 기억을 설명한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 이형곤 작가의 개인적 프로필이 궁금했다
.

저는 좀 늦게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32살에 작가의 길로 들어섰죠. 물론 그 전에도 그림은 계속 그렸습니다. 어려서는 공모전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았고요. 그런데 일과 그림을 병행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림만 그리고 싶더군요. 현실은 그렇지 못했지만 점점 그림 쪽에 비중이 커지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전업작가가 되었습니다.”

이형곤 화가는 작가의 길로 들어선 초기에 눈으로 보여지는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 그것을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과 인물을 그리던 어느날 화가는 내가 지금 잘 그리려고 하는 것은 카메라가 더 잘 표현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내가 왜 사진처럼 잘 그리고 똑같이 묘사하려고 할까?”하고 스스로에게 반문하게 되면서 내가 원하는 그림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의 철학을 하나씩 작업에 투영시키게 되었다. 여기에 영향을 준 사람은 바로 화가 임효(한국화). 작가의 스승인 임효는 홍익대와 대학원을 나와 1990년대 각종 미술상을 석권하며 줄곧 자연을 소재로 삼아 선의 세계를 표현했다. 이형곤 작가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동양의 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스승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노력해 왔다.

스승은 저에게 늘 말씀하십니다. ‘재주를 피우지 말고 좋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 눈으로 보는 예쁜 그림을 그리지 마라고 주의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스승의 말씀대로 철학을 가진 일관성을 가진 작가가 되려고 노력 중 입니다.”

틈나는 대로 홍대와 서강대 등에서 철학과 미술사 강좌를 챙겨 들었다
. 그는 그림을 완성하는데 단순히 붓과 물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철학과 문학 등 보이지 않는 많은 요소가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전시된 작품들에는 천부경 원본이 들어 있습니다. 천부경은 오래전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던 것을 고조선시대에 녹도문이라는 옛문자로 기록되었다가 나중에 진서로 태백산 돌에 새겼는데 이를 최치원이 한문으로 번역해 세상에 전하게 된 하늘의 이치입니다

그가 작품의 배경처럼 희미하게 새겨 놓은 한문들이 모두 천부경이었다
. ‘시간의 기억연작에천부경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천부는 하늘의 법을 뜻합니다. 따라서 천부경은 하늘의 이법을 기록한 경전이죠. 천부경의 상수와 팔괘는 주역의 64괘로 발전했고 태극의 음양론이 되었습니다. 내 작품에 들어 있는 천부경은 고조선시대 기록된 녹도문자로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작가는
5,500년 전의 고조선시대와 현재까지 관통하는 시간을 천부경으로 보여줬다. 천부경에서 인간이 하늘과 땅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가장 지극한 존재로 강조된 것은 동양의 천지인 사상이자 우주관의 기본인 음양론, 태극, 황극, 무극의 사상을 운영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철학이 묻어나는 시간의 기억연작은 천부경이라는 고대의 기록을 현대로 옮겨온 것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는 자칫 진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왜 디지털 시대에 과거를 가져온 것일까?

저는 트렌드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는 동양의 사상과 선의 세계이고 다른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조금씩 내가 하고 싶은 그림, 그리고 싶은 세계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는 앞서 언급한대로 작품을 완성하는데 수십 번의 채색을 입히고 벗기는 작업을 했다
. 작품 하나에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100호는 1개월 정도 소요됩니다. 작은 것은 수삼일 정도부터 수주까지 다양합니다. 작업이 녹록치 않지만 내가 생각한 대로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전율 같은 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화가는 1년에 한두 번 아주 드문 경우지만 그럴 때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설렘이 있고 벅찬 희열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서양화에 비해 동양화는 재료에 대한 한계가 있다
. 그는 작업하는데 재료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동양화를 택했는지 궁금했다.

동양화를 선택한 것은 친한 친구 때문이었어요. 내가 같이 그림을 그리던 친구에게 어떤 쪽으로 할까 물었더니 재료값이 적게 드는 동양화를 추천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나를 배려한 말이었지만 막상 해보니 동양화에 들어가는 재료값도 서양화와 비슷하더군요.”

그는
4년 전부터 사업을 정리하고 강화도의 작업실에서 전업 작가로 그림에 전념하고 있다. 소일거리로 하는 텃밭 가꾸기와 작업에 필요한 역사여행이 창작에 도움을 많이 준다. 앞으로 그는 사라져가는 동양의 선을 현재로 되살리는 작업을 계획 중이다. 서양화 보다 부족한 재료 역시 실험을 통해서 극복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촬영을 위해 자신의 작품 속에서 포즈를 취하는 이형곤 작가를 보며 그의 좋은 작품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최치선 기자사진/정대일 작가)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동양화가 이형곤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아요"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