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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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43 Inverness Street Gallery가 기획한 ‘돌아가자, 장미 여관으로’의 전시 이벤트로서 마광수 교수의 시낭송과 미니 강의가 지난 14일 토요일 한남동 ‘꿀’에서 열렸다. ‘LOVE IS TOUCH’ 라는 주제로 오후 2시부터 대략 1시간 가량 진행이 되었다.

다음은 마 교수의 강의 내용 중 일부 이다.

“사랑은 철저하게 ‘쾌락의 원칙’에 의해서 그 만족도가 결정 지워진다. ‘정신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행위의 준비 단계로서나 존재할 뿐이다. 사춘기 때 우리는 흔히 센티멘털리즘에 젖어 정신적인 사랑에 빠지기 쉽다.

이성을 흠모하고, 숭배하고, 한없이 미화시킨다. 그래서 그때 읽게 되는 러브 스토리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독일인의사랑>이나 <데미안> 같은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를 다룬 작품들일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더 그런 문학작품들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게 되고, 정신 중심의 비현실적인 사랑보다는 직접적인 성애(性愛)를 다룬 작품들을 더욱 좋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춘기 때 정신적인 사랑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나이 때는 성의 직접적 충족을 죄악시하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들은 할 수 없이 일종의 대상적(代償的) 섹스로서 플라토닉 러브에 매달리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는 정신적 사랑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느끼는 사랑이란 엄마의 젖을 빨아먹을 때 느끼는 오럴 섹스(oral sex)로서의 쾌감과, 엄마의 따뜻한 가슴속에 안겨 엄마의 젖가슴을 주무를 때 느껴지는 터치(touch)로서의 쾌감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나는 너를 사랑 한다’고 수백 번 외쳐봤자 소용없다. 아이는 그런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사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한번 껴안아 주거나 한번 아이의 볼을 부벼 주는 것이 아이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터치’를 포함한 일체의 피부접촉이 사랑의 전부였던 셈이다.

이것은 어른들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사춘기 때나 결혼 전의 청년기 때 자칫 우리들이 정신적인 사랑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소년기 이후 이러한 피부 접촉이 오히려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때는 엄마의 젖가슴을 주물러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지만, 중학교 들어갈 나이만 되어도 그런 행동은 망칙한 짓'으로 간주되어, 사춘기를 전후한 나이의 성적 기아 상태는 심각한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어 청소년들의 정서를 피폐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그들은 스스로의 성적 기아상태를 어떻게 해서라도 벌충해 볼 목적으로 ‘정신적 사랑’이라는 대상물(代償物)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 ‘정신적 사랑’에의 믿음이 결혼 직전까지 간다면, 그 사람의 결혼 생활은 불행해지기 쉽다.

결혼이란 것은 사실상 합법적으로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결혼 이후에까지도 육체적 접촉을 불결시하는 고정 관념이 남아 있게 된다면, 내외 관계는 파탄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동기나 소년기, 그리고 결혼 전까지의 청년기에 걸쳐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성적 기아 상태를 모면하게 해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앞으로 진지하게 토의되고 연구되어야만 한다.

아무튼, 사랑이란 쾌락 원칙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사랑의 쾌락은 오로지 ‘육체적 접촉’에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입으로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육체적 언어(Body Language)’ 만이 사랑을 전달해 준다. ‘비틀즈’그룹의 존 레넌이 부른 노래 가운데 <사랑(Love)>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 가운데 ‘Love is touch, Love is feeling’ (사랑은 접촉, 사랑은 느낌)'이라는 대목이 있다.

나는 사랑을 이만큼 정확하게 정의한 말도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렇다. 따뜻한 접촉감, 포근한 안식감 같은 것들이 바로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터치(touch)’는 ‘만지다’ 외에 또 ‘감동시키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어루만져주어야만 감동 한다’는 의미가 ‘터치(touch)’란 단어 안에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섹스가 곧 사랑이라고 말하면 섹스를 ‘성교’의 의미로 받아들여 성교해야 만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섹스는 보다 더 넓은 뜻으로 쓰여 져야 한다. 터치도 섹스고 키스도 섹스다. 모든 사랑의 애무는 다 섹스다. 사랑의 행위에서 관념을 배제시킬 수 있을 때, 그리고 섹스의 의미를 보다 폭 넓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의 애정 생활은 풍부해진다. 나는 성교 자체보다 터치(touch)를 위주로 한 애무에 더 비중을 두고 싶다.

터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 있다. 영어를 자꾸 써서 미안하지만, ‘Sucking(빨기)’과 ‘Licking(핥기)’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역시 어린아이 때의 성 행동의 패턴이기 때문인데, 그러므로 나는 존레넌의 가사에 덧붙여 사랑을 나 나름대로 이렇게 정의하고 싫다. ‘Love is touch, Love is sucking, Love is licking, Love is not inter-course !(사랑은 접촉이고, 빨고 핥는 것이다. 사랑은 삽입성교가 아니다!)’라고.

사랑의 행위를 함에 있어, 손으로 만지고 혀로 빨고 핥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화시키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아주 불결시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여자들 가운데는 실제의 성교는 마지못해 한다고 하더라도 ‘디프 키스(Deep Kiss)’나 특히 ‘구강성교(fellatio)’만은 더러워서 못하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사랑의 기쁨을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심리상태는 대개 도덕적, 종교적으로 억압되어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오로지 만지거나 더듬고 핥고 빨면서 쾌감을 맛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로틱한 쾌감은 성교에 의한 사정(射精)과 수정(受精)에 있지만은 않다. 진정한 쾌감은 ‘애무(petting)’에서 오는 것이며, 페팅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것은 손과 혓바닥이다. 혀는 미각을 담당하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소중한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외에도 마광수는 1995년 ‘즐거운 사라’ 건으로 구속 당시에 부조리했던 대법원의 판결 상황과 지금도 특히 지식인 사이에서 만연하는 성에 대한 이중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논하였다.

사랑과 성(性)에 대한 그의 생각과 더불어 3편의 시, ‘가자, 장미여관으로’, ‘변태’, ‘그때 그 블루스’ 등의 시 낭송으로 진행된 이벤트는 중간 중간 방문객의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함께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전시는 2월10일까지 계속되며 전시장 꿀에서는 마광수의 최근작 <돌아온 사라>, <페티시 오르가즘> 등 2권의 소설이 구비되어 있어 원하는 관람객들은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돌아가자, 장미여관’ 전시 개요]
전시 기간: 2012.1.12~2012.2.10
초대 일시: 2012.1.11 수요일 오후 6시
전시 장소: 꿀/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683-31
참여 작가: 마광수, Chad McCail, 이재우, Klega
마광수 시 낭송과 미니 강의: 2012.1.14 토요일 오후 2시
전시 문의: 이정은(mail@43inverness-street.com)
관람 시간: 오후 12:30~11시, 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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