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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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마리이상을 키우는 마굿간을 가지고 있으며, 1187년 이슬람 살라딘 군대가 기사단 공격한 곳이며

 최근 사이언스 YTN 로스트월드 데이빗 리콜 중세연구학자 의 학설과 그모습이 웅장하게 소개 되었다.

1291년 8월 기사단시대 부터 1307년 프랑스 기사단체포까지의 역사와 함께 한 아~~~초 유명한 성이다.

 토로토사성과 160km떨어진 키프로스섬과 리아드섬의 1300명 기사단의 마지막을 잘보여준다.

한폭의 그림같은..그래서 더~멋진 우리에게는 영화에서 나오는 성이기에 더~기억하는 곳이기도하다.

십자군은 그 숫자로 볼 때 대군은 아니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십자군 수는 15,000명을 넘지 못했다. 그 후 예루살렘에 주둔했던 십자군 기사들은 고작 300명 정도였다. 소수의 십자군이 다수의 적대적인 지역을 관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십자군은 수적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군사적 요지에 수많은 성채들을 건설하게 되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장악해 갔다. 십자군 성채는 군사들이 주둔하는 요새였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다. 클락 데 슈발리에는 모슬렘의 중요한 도시 홈스(Homs)와 지중해를 잇는 중간지점의 전략적 위치에 세워졌다. 이 성채가 완성되었을 때 모슬렘 사가는 모슬렘 세계의 '목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했다.

클락 데 슈발리에는 해발 750m의 칼릴(Khalil)산 정상에 오각형 형태로 우뚝 서 있다. 길이는 남북으로 200m, 동서로 140m나 되며, 면적만 해도 1만평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다. 이 성채의 특징 중 하나는 성벽이 완벽한 이중구조라는 것이다. 우선 든든한 외성이 있고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높게 쌓아 올린 내성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다. 외성과 내성 사이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해자를 만들었다. 내성은 성벽을 직각으로 쌓지 않고 그 밑부분을 45도 각도로 경사지게 만들어서 해자를 넘어온 적들이 성밑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성 밑부분은 경사지게 만든 것은 성벽자체가 지진에 견딜 수 있게 하는 효과도 지녔다고 한다. 성내부에는 바닥이 꺼지면서 적을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장치, 가득 채우면 몇 년까지 버틸 수 있는 곡식저장소, 거대한 물 저장소, 120m에 달하는 대집회소, 예배소, 식당, 숙소, 미로같은 비밀통로 등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OOO람교도인 모슬렘들은 이 성채를 빼앗기 위해 여러 번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무적의 살라딘도 이 성채를 공략하러 갔다가 성공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다음날 철군했다는 일화도 있다.1271년 이집트의 술탄 베이발스(Sultan Baybars)는 군대를 이끌고 이 난공불락의 요새 클락 데 슈발리에를 공격했다. 격전 끝에 외성을 뚫는데는 성공했지만 내성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를 함락시키는 것이 무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세이발스는 한가지 계략을 꾸몄다.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성안의 십자군들에게 한 통의 밀서가 전달되었다. 그것은 십자군 총사령관이 보낸 밀서였다. 거기에는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투항하여 유럽으로 퇴각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저항하던 십자군들은 베이발스에게 유럽으로 돌아가는 안전한 귀로를 보장하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베이발스가 이 조건을 수락하자 십자군 성채에는 백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사실 그 밀서는 베이발스가 꾸며낸 가짜였다. 그러나 그의 밀서로 인해 성채는 파괴되는 운명을 면할 수 있었다. 1271년 이 성채의 함락을 시작으로 십자군 성채들은 차례로 모슬렘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20년 후인 1291년, 십자군 최후의 보루 아코(Acco)가 함락됨으로써 십자군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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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크라테 슈발리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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