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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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7일 인천국제공항 아침 7시 비행기. 나는 투덜대면서 비행기를 기다렸다. 다이빙 동호회팀과 함께 떠나는 팔라완 여행. 그런데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무슨 비행기 시간을 새벽에 잡아 놓았담. 너무 이른 아침이라 면세점 태반이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면세점 할인쿠폰까지 인쇄해 왔건만, 덕분에 고대했던 면세점 쇼핑은 물 건너갔다. 게다가 비행기는 기내식이나 어떠한 음료조차 제공하지 않는 저가 항공사인 세부퍼시픽. 세부 퍼시픽은 가격은 저렴할지 몰라도 3달 동안 필리핀에서 살아야하는 나에게 결코 적당한 항공편은 아니었다. 개인당 보낼 수 있는 수하물이 15kg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팀원들에게 배당된 무게에서 남는 만큼 더 보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무거운 다이빙 장비 때문에 이미 overcharge를 물어야 할판. 그래서 면세점 쇼핑백에 급하게 내 짐을 옮겨 담았다. 다행히 기내로 들고 갈 수 있는 수하물은 7kg까지 허용이 된단다.


4시간 비행 후 도착한 마닐라 공항은 열기 그 자체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엄습한 습하고 더운 열기.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느낀 필리핀의 감상이다. 팔라완까지는 마닐라 공항에서 다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서 가야한다.


팔라완 비행기는 역시 세부퍼시픽 항공으로 1시에 있었다. 알고 보니 팔라완에 가는 리드타임을 줄이기 위해서 세부퍼시픽으로 이른 아침에 비행기 스케줄을 예약한 것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다시 탑승인원이 50명이 될까말까한 프로펠러가 달린 작은 경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언제 추락하지는 않을까하는 불안한 마음을 읊조리며 45분 동안 날아 팔라완 부수앙가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 해외자원봉사기구인 코피온에서 지어준 팔라완 부수앙가 공항은 큰 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작은 규모에도 어떻게 이곳에서 공항을 만들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공사기간 중 건축자재는 어디서 조달받았는지 인부들은 어떻게 동원했는지 신통할 정도로 이곳 팔라완은 정말 ‘외지’였다. 비행기에 내리고 나서 나는 2층 이상의 건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온통 주변은 민둥산이 언덕과 바나나 나무뿐이었다.


우둘투둘한 비포장도로를 지나 20분 정도 가자 우리가 묶게 될 숙소 Inn이 나왔다. 리조트나 호텔을 기대했던 다이빙팀은 실망이 컸다. 천장에는 도마뱀 암수 한 쌍이 다정하게 기어 다니고 있었고 우리숙소 바로 옆에는 닭을 키우는 농가가 있었다. 매일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온 동네 수탉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목청껏 울어대는 통에 새벽에는 잠을 설쳤다. 수탉이 울고 나면 동네 개들이 한바탕 짖어댄다. 시골 외딴 곳의 싸구려 여인숙 급이었던 이곳은 닭과 개 짖는 소리와 함께 필리핀의 낭만과 로맨스를 무참히 날려 보냈다.


내가 첫 번째로 방문한 필리핀 팔라완은 군도국가 필리핀에서 5번째로 큰 섬이다. 남북으로 긴 팔라완 섬 주변에는 무수한 작은 섬이 있다. 섬의 북서쪽에는 부수앙가 섬(Busuanga), 쿠리온 섬, 코론 섬(Coron) 등으로 구성된 칼라미안 제도(Calamian)가 있는데, 내가 이번에 방문한 곳이 바로 팔라완 코론섬이다. 필리핀 굴지의 좋은 어장인 동시에 진주농장, 완벽한 형태의 온전한 산호를 간직한 다이빙 명소로 알려져 있다.


팔라완의 불편한 교통편 때문인지 팔라완은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서 필리핀인들 사이에서도 미지의 섬으로 여겨진다. 팔라완의《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강 국립공원》과 《투바타하 암초 해양공원》은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깨끗한 환경이 사람의 손길, 발길이 닿지 않았기에 가능한 만큼 팔라완에는 어떠한 편의시설 하나 찾아보기 어렵다. 큰 은행이나 병원, 호텔도 없다. 노래방이나 당구장? 당연히 없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인데 불구하고 한식이 제공되지 않아 현지식을 먹어야 한다.


특히 아저씨들에게 현지식 식사시간은 곤욕스러운 시간이었다. 고추장이나 김치를 이곳에서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필리핀에서 그 흔한 지프니(필리핀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현지 교통수단 중 하나)조차 다니지 않는다. 이곳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자전거 혹은 오토바이 인력거인 트라이시클 뿐이다.


하지만 이곳이 스쿠버 다이버들에게 천국이라는 점에는 깊게 공감한다. 보라카이나 세부에는 그간 수많은 다이버들의 발길질에 산호들이 처참하게 부셔져 이제는 거대하고 웅장한 산호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수심 5m만 내려가도 아름다운 산호밭이 펼쳐져 있다. 게다가 팔라완 섬 주변에는 세계 제2차 대전 때 침몰한 일본해군의 크고 작은 난파선을 여러 척 볼 수 있어 수많은 스쿠버 다이버들을 설레게 한다.


도착한 날 저녁에는 피로도 풀겸 노천 온천에 갔다. 트라이시클을 타고 20분 동안 어두운 산길을 막 달린 뒤에 도착한 그곳은 입장료가 100페소(한화 3000원) 밖에 되지 않았다. 천연 해수탕인데 어슴푸레한 달빛이 드리어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1시간 동안 느긋하게 천연 노천탕을 즐기며 여독을 풀었다.


도착 후 다음날부터 바로 다이빙을 시작하였다. 첫날에는 주변 관광도 하고 바에서 술을 마시기도 해서 다음날 다이빙을 점심 이후부터 시작하는데, 이곳에서는 딱히 스쿠버 다이빙이외에 할 일이 없었다.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우리 모두의 목표는 하루 3회 이상 다이빙을 하는 것. 우리 다이빙팀은 월요일 날 오고 그 주 토요일 날 마닐라행 비행기를 예약해 놓았다. 비행기 타기 24시간 전에는 혈중 질소 농도의 차이 때문에 다이빙을 하면 안된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가 다이빙을 할 수 있는 날은 화수목 단 3일뿐이었다.


아침 먹고 9시에 다이빙 장비를 챙기고 우리는 트라이시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게이트웨이로 갔다. 이곳은 일종의 호핑이나 스쿠버 다이빙, 스노쿨링을 위한 배들을 정박해 놓은 선착장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20~30분 정도 바다를 헤치고 가면 가이드가 추천해주는 다이빙 포인트에 다다른다. 첫 번째 다이빙 포인트는 시험다이빙으로 안성맞춤인 10m 깊이의 산호밭이었다.


제주도나 세부에서 볼 수 없었던 크기와 모양의 산호가 펼쳐져 있었다. 밑바닥 빼곡하게 채운 형형색색의 기묘한 산호들에 첫 다이빙부터 만족이었다. 가이드는 일부러 첫 시작부터 좋은 포인트로 데려가지 않는다. 하지만 첫 다이빙이 이 정도라면? 우리의 기대감은 더 커졌다.

두 번째 다이빙 장소 또한 대만족이었다. 두 번째 다이빙 장소는 수온이 3개 층으로 나뉜 신비의 호수 바라쿠다였다. 호수가 있는 섬 입구 선착장에 배를 대고 내려서 약 100여개의 나무 계단을 지나면 기암괴석과 나무 사이에 숨겨진 청정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 주위에는 화공이 정으로 깎은 듯 하나하나가 조각 같은 석회질 절벽이 둘러싸여 있어 사진을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장관으로 나온다.

호수 밑바닥에서 온천수가 나와 수면에는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오고 있는데 이 해수온천으로 인해 수중으로 깊이 내려갈수록 물 온도가 높아진다. 바다에서처럼 화려한 산호를 볼 수는 없지만, 3단계의 수온층과 호수 밑까지 이어진 절벽의 절경은 신비함 그 자체였다.


수온은 섭씨 28도에서 38도 사이로 다이나믹하게 변화하며 담수와 해수의 경계가 되는 수심 4~14미터에서 수온 약층을 볼 수 있다. 호수의 왕이라고 칭해지는 이곳은 다이버들이 꼭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명소인 동시에 극악 난이도의 다이빙 포인트로 꼽히기도 한다. 특히 호수 북쪽 수중절벽 수심 33미터부근에는 아주 깊고 난이도 높은 수중 동굴이 있다. 나의 오픈워터 자격증(스쿠버 다이빙 초급자 자격증)으로는 수중동굴까지 무리라고 판단되어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반드시 도전해보리라 다짐했다.


두 번째 다이빙을 마치고 고대하던 점심시간이 왔다. 현지 로칼 가이드들은 우리가 2번째 다이빙을 하는 동안 배위에서 돼지와 닭고기 바비큐를 준비하고 있었다. 숯불로 구운 닭고기와 돼지고기는 정말 감질나고 맛있었다. 점심메뉴는 바비큐 외에도 마요네즈와 바나나 케첩으로 버무린 필리핀 스타일 양상추 샐러드와 후식으로 망고와 파인애플이 나왔다. 메뉴가 다양한 편은 아니었지만 2번의 다이빙으로 허기진 참에 아름다운 산호바다 풍경을 감상하며 먹는 점심은 지금까지의 만찬 중 가장 최고였다. 이것이 진정한 파라다이스일까?

역시 만족스러웠던 다이빙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 씻고 나오니 벌써 해가 떨어지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발코니에 서서 농가 쪽을 바라보다가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저녁이 되니 암탉 네 마리가 울타리 위로 올라와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잠을 자는 것이었다. 내가 팔라완에 머무는 5박 6일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네 마리는 울타리위에서 서로를 의지하면서 잠을 청했다.

저녁은 현지식으로 나오는데, 해산물이 풍부한 팔라완답게 씨푸드 위주로 나왔다. 주로 해초샐러드나 생선구이, 게와 가재 같은 것이 저녁메뉴로 나왔다. 특히 바다포도라고 불리는 탱글탱글한 청포도송이같이 생긴 해초는 식감이 독특해서 기억에 남는다. 입에 톡톡 터질 때마다 알맹이에서 짠 물이 나왔다.

외계생물체처럼 생긴 이 바다식물은 열대와 아열대 지역에 분포하며 미네랄, 칼숨, 철분이 풍부한 건강식이다. 내 경우에는 숙소에서 제공하는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는데, 같이 온 다이빙팀 대다수는 현지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라면을 끓여먹었다. 나는 그런 그들이 참 안타까웠다. 한 곳에 너무 익숙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불편한 일이다.


씨푸드 호사 외에 할 수 있는 또 다른 호사는 맥주와 열대과일이었다. 같은 팀 아저씨들은 저녁식사 동안 시원한 산미구엘 맥주를 주문하여 마셨다. 한국에서 1캔에 7000원인 산미구엘 맥주는 이곳에서 1병에 1000원꼴이다. 산미구엘 맥주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대개는 산미구엘 라이트나 필센을 주문했다. 저렴하지만 숙취도 없어 매일 음료대신 시원한 맥주를 마시게 된다.


그러나 맥주보다도 내가 이곳에 머물면서 가장 행복하게 한 것은 바로 달달한 망고를 질리도록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매일아침 필리핀 현지 가이드인 딴띠는 나를 위해 새벽시장에서 망고 2kg과 코코넛(부코) 열매 2통을 사왔다. 나는 팔라완에 머무는 동안 하루 평균 7~8개의 망고를 혼자서 다 먹었다. 하도 먹어서 입주변이 노랗게 물이 들 정도였다.


그러고도 부족해 아침저녁으로 코코넛 열매에 빨대를 꽂아 코코넛 주스를 마셨다. 덕분에 딴띠는 아침저녁으로 단단한 코코넛 열매를 낫으로 베어놓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냄새난다며 꺼려하는 과일들도 잘 먹었다. 이를테면 코코넛 주스나 두리안이 대표적인 예다. 두리안은 이 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과일이다. 종류도 수십 가지나 된다. 싸고 희귀한 과일이 풍부한 이곳은 나에게 천국이다.

코론 아일랜드의 바다는 보석상자 같다. 색색의 아름다운 보석 같은 산호를 품고 있으니 말이다. 내 키만한 에그산호나 병모양의 산호, 엄청 넓은 팬(부채)산호와 테이블산호의 크기에도 놀라지만, 아무 규칙 없이 막자란 듯해도 서로서로가 바다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바다 속 생태계의 더 큰 신비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산호와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바다속 생명체에 대한 경이로움도 느낄 수 있었다.


독이 있는 가시지느러미를 지닌 라이언 피쉬와 우리가 흔히 니모라고 알고 있는 작은 물고기까지 형형색색의 다양한 크기의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어 꼭 거대한 수족관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물론 산호 외에 팔라완의 바다는 진짜 보석을 품고 있다. 바로 ‘진주’이다. 팔라완에는 필리핀의 명물인 진주농장이 많다. 필리핀의 남양진주는 품질도 우수하고 가격도 저렴한 것으로 유명하다. 진주를 캐오고 싶었지만 다이빙을 하면서 바다에 있는 어떠한 것도 건드리거나 가져와서는 안된다. 특히 진주농장 진주조개를 건드리면 2000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한단다.


우리 다이빙팀은 바라쿠다 호수 2번, 몇 번의 산호바다 다이빙을 하고 코론 아일랜드의 명물인 난파선 다이빙에 도전했다. 코론 아일랜드에는 세계2차 대전 중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로 20척의 일본 군함이 난파되었으며 그 중 14척이 발견되어 다이빙 포인트로 각광받고 있다.

난파선이 있는 곳은 조류가 센 편이라 부표와 연결된 밧줄을 잡고 내려가야 한다. 깊은 곳은 45m까지라서 어둡고 시야가 흐려 반드시 다이빙용 손렌턴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처음 난파선 다이빙에 도전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수심도 수심이지만 전쟁 중 난파된 것이기 때문에 난파선에서 유골을 보게 될까봐였다. 지금생각하면 참 엉뚱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육체와 같은 대다수의 가벼운 것들은 모두 조수에 떠내려가고 남아 있는 것은 무겁고 을씨년스러운 철제 구조물뿐이었기 때문이다.


70년 전 침몰된 배는 그 세월을 증명하듯이 세찬 조수에 찌그러지고 바닷물에 부식되었으며 산호로 뒤덮여 배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한눈에 봐도 오랫동안 이곳에 딱 붙어살았을 어린아이 크기만 대왕조개가 서식하고 있었다. 어두운 배 안에서는 은빛 정어리떼들이 무리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랜턴 빛에 반사된 정어리떼가 멋진 광경을 연출했다. 무서움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황홀감만이 남았다.


떠날 때가 되니까 다이빙 한번이 아쉽다. 처음에는 하루 3번이 힘들어서 2회씩 한 적도 있는데,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5박 6일은 빠르게 지나갔다. 팔라완 코론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우리 숙소 안주인이 직접 준비하였다. 싱가포르에서 산 적이 있다는 그녀의 요리 솜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현지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던 100% 순수 한국 아저씨들도 그녀의 요리에 밥을 몇 그릇이나 비었다.


매콤달콤한 소스에 버무린 그릴새우와 매콤한 마늘 소스가 일품인 랍스타, 코코넛 밀크가 들어가 순하고 부드러운 필리핀식 카레인 기나탄(ginataan) 그리고 참기름에 고소하게 무친 나물까지. 화기애애하게 팔라완의 마지막 밤은 입이 즐거운 풍성한 씨푸드들과 함께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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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필리핀의 보석상자 '팔라완의 해저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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