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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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왓푸.
돌아오는 길은 훨씬 더 힘들었다. 정오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 몸의 수분은 바닥이 난 상태여서 땀조차도 흐리지 않는다.

점점 온 몸이 말라 가는 것을 느끼면서 필사적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한번이라도 멈추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아 쉬지도 못했다. 그때 저기서 혼자 놀고 있는 한 아이가 보였다.

친구도 없이 혼자 길가에 흙을 파며 노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왠지 측은해서 잠시 발길을 멈췄다. 준비해간 볼펜이라도 나눠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놀라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몰골 때문이었을 것이다.

   
라오스의 전통 목조 가옥.
탈수에 빈혈까지 겹쳐 초첨을 잃은 눈과 시꺼먼 얼굴은 그 아이에게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처음 본 외국인이 이상한 언어를 써가며 자길 부르니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래도 내가 계속 친근함을 표시하고 볼펜을 선물하자 이내 예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한 동안 열심히 흙길을 달려 겨우 겨우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너무 피곤했기에 방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쓰려져 기절해버린 듯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꿀맛 같았던 낮잠에 깨어나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산들바람이 평화로운 오후를 맞이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하다.

순간 내 머리 곁을 광속으로 지나치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저씨의 한마디가 있었으니 “참빠삭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 버스는 오후 1시에 있어요”... 놀라서 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간은 벌써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었다. 아뿔사! 난 하루에 오직 한 대밖에 없는 버스를 놓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볼 것도 즐길 것도 없는 이 시골마을에 하루 동안 갇혀버린 것이다.
   
크메르 왕조가 왓푸에 만든 거대한 인공호수.

어제 밤 오랜 시간 세운 여행계획들이 또 어긋나기 시작했다. 언제나 내 계획표은 채 하루도 가지 못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이제 여행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져만 간다.

답답한 마음을 위로할 겸 마을을 산책하기로 했다. 어제 길을 잃어 고생을 많이 한 덕분인지 오늘은 이 길이 눈이 익숙하다.

사실 참빠삭은 길이 오직 하나 밖에 없어 제대로 집중하며 둘러보면 한번 만에 지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한적한 시골 마을을 한 10분 정도 걸었을까? 내 앞에 동양인 남자 한명이 나타났다.

그는 마치 인디아나 존스에 나올법한 탐험가 복장을 하고 지도와 길을 여러 차례 번갈라 보며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었다. 이미 빡세에서 일본인에게 한국인인줄 알고 괜히 오버하며 친한 척했다가 무안해졌던 경험이 있어 일단은 그냥 목례만 하고 지나치기로 했다. 서로 목례를 하며 눈을 마주쳤지만 그 어떠한 말도 주고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산책을 계속했다.

   
텅 빈 도로를 한가로이 걷는 오리가족들의 모습.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 나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를 보내고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적적한 시골마을에서의 하루를 같이 보내줄 말동무를 그냥 보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 언제나 처럼 지나버린 일에 후회를 하며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30분 정도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시 그 동양인을 만났다.

나는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는 한국이 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기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말없이 손짓과 눈짓으로만 살아온 내게 한국말로 나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더구나 타국의 시골마을에서 한국인을 만날 줄이라곤 생각조차 못했기에 기쁨은 두배였다. 그도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차리고는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에게 내 게스트 하우스로 가서 간단한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비어라오(라오스 국민 맥주)와 더불어 여러 음식을 주문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한국 문화재 보존 분야의 젊은 인재로 현재 캄보디아에서 문화재 보존 사업에 관하여 연구하고 있는 유일한 한국 학생이었다.

그는 이름은 동희이고 나보다 5살 정도 많았다. 동희형은 캄보디아에서 연구를 하다 휴가차 숨겨진 문화유산을 구경하러 이웃나라인 라오스에 온 것이었는데, 그 문화유산 중 하나가 바로 ‘왓 푸’였고 그래서 참빠삭으로 온 것이었다. 그도 나를 처음 보았을 때 많이 놀랐다고 했다. 이러한 시골마을에 19살 먹은 한국청년이 혼자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말동무를 만난 우리 두 사람의 수다는 끝이 안보일 정도로 계속 됐다. 서로의 전공분야부터 현재 동남아의 정치상황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토론을 계속했다. 묘하게도 우리들은 말이 잘 통했다. 더구나 형이 내게 해주는 말들은 정말로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문화재보존이라는 독특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내가 여행하고 있는 라오스의 현황과 미래까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공부중인 동희형이 ‘자이니치(일본에 사는 조선인)’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줄 땐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았을 정도로 집중했었다. 우리들의 수다는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가 되서야 끝을 드러냈다.

동희형이 더 늦기전에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희형은 내일 일찍 ‘왓 푸’로 문화재 탐험을 떠나야 해서 오늘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기에, 나는 더 이상 형을 붙잡아 둘 순 없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왠지 오랜 친구 같았던 형을 떠나보내자니 아쉬워서 메일 주소정도를 교환했다. 그렇게 진한 여운을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다.
 

어긋난 계획으로 인해 소중한 인연이 하나 만들어지기도, 또 다른 계획으로 인해 헤어지기도 하는 게 여행이라는 것을 깨달은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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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몽상가 순수의 땅 라오스에 가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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