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 전체메뉴보기
 
▲ 러시아 산맥을 지날 때 이름 모를 창공을 날고 있었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환상과 동경은 그곳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문제는 그 환상이 얼마나 실제 경험과 일치하는가의 여부이다. 대체로 미지의 장소에 대한 환상과 동경은 실제 경험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카네만에 따르면, 인간은 경험하는 주체와 기억하는 주체로 나눌 수 있다. 다시 말해, 여행 중의 경험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의 기억은 사실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여행 전반이 불만족스럽더라도 여행 후반부에 아주 놀랍거나 즐거운 경험을 했다면, 그 여행 전체가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여행 전반이 만족스럽더라도 후반부에 모든 사진과 여권을 도난당하는 경험을 한다면, 그 여행 전체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마치 긴 코스의 식사가 평범했어도 마지막에 디저트가 황홀했다면 그 식사 전체가 기억에 남는 것과 같다.

여행기의 대부분에는 이러한 과장과 축소가 어떻게든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형성된 신참 여행자의 환상과 동경은 실제 경험에 의해 깨지기 쉽다. 그래서 정말 기대하는 영화가 있다면, 일부러 어떠한 정보도 듣지 않음으로써 아무런 기대와 편견도 갖지 않고 보는 게 낫다. 영화는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이 가능하지만, 여행 장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 한 나라의 도시라면? 그것도 아주 유명한 도시라면? 게다가 그 도시가 파리라면?


파리에 대해 어떠한 기대, 환상, 그리고 동경을 갖지 않는 일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수많은 소설, 영화, 음악, 여행기, 음식잡지들이 파리를 예찬한다. 혁명, 자유, 관용과 같은 단어들도 파리와 맞물려 있다. 언제나 예술과 패션, 미식의 으뜸으로 꼽히며, 파리에서라면 누구라도 사랑하고 행복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여행 동반자인 거북과 유럽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을 때, 유럽에서 어디로 가느냐는 더 얘기할 필요가 없는 물음이었다. 당연히 파리로 가야만 했고, 일정을 저울질하다가 파리에만! 있기로 했다. 그리고 파리로 가는 일본항공 왕복항공권이 모든 텍스를 포함하여 68만 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더 생각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항공권을 구매했고, 2010년 2월 26일 출발.

우리는 일본을 경유해서, 다음날 저녁 파리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알고도 당했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은 생각 이상으로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몇 편의 영화를 보고, 몇 번의 밥을 먹고 나니 착륙할 때가 되어 파리 전체 모습이 창밖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저게 설마 파리일까 싶기도 했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에펠탑의 모습은 저게 바로 그 파리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우중충한 날씨는 우리의 설렘을 억누르기에 역부족이었다. 속된 말로 사람이 웬 수라는데, 사실 우리의 기분을 망친 건 날씨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사실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었다.


어쨌든 결국 샤를 드 골 공항 도착했고, 입국심사는 어이없으리만큼 간단하고 빨랐다. 여권에서 국가를 확인한 다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말을 건네 주고서, 바로 통과했다. 생각해보면 여기저기서 이민자들이 쑤셔 드는데 굳이 공항에서 관광객 상대로 철저히 뭘 따져볼 게 없겠군 싶었다. 우리는 시내까지 RER을 타고 들어가기로 했는데, 이때부터 경계(!)가 시작됐다. 파리에서의 소매치기와 관광객을 상대로 한 사기가 극성을 부린다는 말에 우리는 만발의 대비를 했다. 현금은 작은 크로스백에 넣어 어깨에 멘 후 그 위에 니트를 입어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는 코트까지 입었으니 소매치기가 아예 불가능했다.


문제는 소매치기가 아니었다. 더 웃기는 건 뻔히 다 알고도 당했다는 거다.


일단 공항에서 RER 표를 사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려 하는데, 맞은 편 계단에서 흑인들이 재빨리 아래로 뛰어내려 가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저 사람들 동양 관광객들 왔다고, 털러 내려가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나서, 인터넷에서 그렇게 여러 번 읽은 그 수법 그대로 내려가서 당해줬다.


RER 자동 발매기에서는 어린이표도 구매할 수 있는데, 흑인들의 수법은 발권을 도와주는척 하면서, 어린이표를 뽑아주고 나머지 돈을 슬쩍 챙기는 것이다. 가장 흔하고 널리 알려진 수법임에도 우리는 당했다. 거북 녀석이야 모르고 돈을 줬지만, 뻔히 지켜보고 있던 나 역시 알면서도 완강하게 굴지 못했다. 왜냐하면, 도움을 주려 했던(사실, 사기를 치려 했던) 그 흑인 아저씨의 눈빛이 너무 호의적이었고, 그 순간 흑인은 곧 사기꾼이라고 도식적으로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했고, 뽑아준 표는 역시나 어린이용 한 정거장 가는 표임을 확인했을 때, 그냥 짜증만 치밀었다.


이미 다시 받는 건 체념했고, 그 흑인 아저씨는 그 와중에도 친절하게 까페에 들어가 지폐를 잔돈으로 바꾸어 거슬러다 줬다. 되려 나는 그 흑인 아저씨보다는 돈을 건네준 거북에게 짜증을 냈고, 갑자기 짜증이 더 치밀어서 '이 XX 어디 갔어 돈 받아와야지' 하고 결심을 굳혔을 때 이미 그 흑인 아저씨는 보이지도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매표소 가서 이 표를 사용할 수 있냐고 물으니, 역시나 '당했구나' 라는 눈빛과 사용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게다가 RER은 바로 탈 수 없었고, 버스를 타고 어디까지 가서 다시 타라는데, 숙소 체크인 약속 시간도 촉박했다. 그토록 시내 진입 때까지 안 털리려고 목걸이 지갑을 걸고 그 위에 니트를 입는 짓까지 했는데, 가장 흔하고 뻔한 수법에 고스란히 돈을 바친 것이 너무 짜증 났고, 이때부터는 끄물거리는 날씨까지 짜증 나기 시작했다. 막말로 뭐 이런 데가 다 있나 싶었다. 자동발매기 앞에서 관광객 상대로 사기 치는 건 고전적인 방법 중 하나고, 계단을 서둘러 뛰어 내려가는 흑인들로 봤을 때는 비행기마다 그렇게 사기를 친다는 건데, 그렇다면 공항에선 도대체 왜 자동발매기에 직원 한 명을 두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항 밖의 RER 역까지 버스로 가게 된 탓에 공항과 시내 사이의 북부 지역을 볼 수 있었는데, 심란함은 더해갔다. 거의 유색인종 거주지역으로 매우 낙후된, 그야말로 미국 영화 속 할렘스러운 동네였다. 결국, 사기를 치는 몇 사람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였다. 짐작하건대 차라리 관광객을 상대로 한 그런 사기는 어느 정도 용인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정도의 사기라도 용인되지 않으면, 더 심각한 범죄나 사회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파리는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미지가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안에 모순도 존재하는 그런 도시로서 우리를 맞이했다.


그래도 파리는 환상적이더라...


어쨌든 겨우겨우 RER을 타고 샤틀레 역까지는 왔는데, 이 역은 너무 복잡했다. RER과 메트로 여러 호선의 환승역인데다가 출구도 워낙 많아서, 결국 아무 데로나 나가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나갔는데, 나가자마자 딴 세상이다. 따뜻한 조명에 까페, 식당들이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고, 테라스에서는 사람들이 유쾌하게 떠들면서, 식사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 파리 외곽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의 도심


























한마디로 거의 환상적인 분위기였다. 갑자기 나타난 캐리어를 끈 두 명의 동양인은 제법 시선을 끌었는지, 사람들은 계속 우리를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공항에서 당한 일과 끄물거리는 날씨, 그리고 이곳으로 오기까지 파리 외곽의 우중충함과 대조되는 또 다른 풍경에 어리둥절하며,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파리① 파리에서 만난 두 개의 풍경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