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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紙與竹而相婚 生其子曰淸風(지여죽이상혼 생기자왈청풍)대나무와 종이가 혼인해 자식을 낳으니 바로 맑은 바람이라


▲ 합죽선/김동식 선자장 제공  /사진: 정대일 작가

30도를 훌쩍 넘기는 무더운 여름철에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시원한 물건이 먼저 생각날 것이다. 선풍기, 에어컨, 얼음팩, 부채 등은 여름철 필수품이다. 그중 손부채는 휴대성이 가장 뛰어나다. 특히, 잘 만든 부채를 들고 있으면 시원함은 기본이고 왠지 멋스러움마저 느껴진다. 이달의 명장을 찾기 위해 고민하던 중 떠오른 부채는 8월에 가장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부채의 명장 즉 선자장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한식, 한지, 한옥 등 한스타일로 유명한 전주가 바로 부채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전주부채검색을 하자 전주부채문화관이 나왔고 그곳에서 최근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김동식 선자장을 소개 받았다 

▲ 김동식 선자장과 인터뷰 시작전 담소를 나눴다.  /사진: 정대일 작가

인터뷰를 약속한 날 전주로 내려가면서 김동식 선자장에 대한 최근 기사를 살펴보았다. 문화재청은 지난 13선자장을 중요무형문화재 제128호로 신규 지정하고 평생을 합죽선 제작과 전승에 힘써온 김동식(72)씨를 보유자로 인정했다. 선자장은 전통 부채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말한다. 이렇게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인 김동식(73합죽선) 선생은 지난 713일 선자장 부문 국내 최초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됐다.

김동식 선자장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일은 개인으로서도 영예지만 60년 넘게 설움을 받던 전주 부채가 드디어 자존심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까지가 많은 언론에서 그에 대해 소개한 주요 내용이었다. 그렇게 선자장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면서 약 3시간을 달려 내려가자 어느덧 장인의 집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니 장인의 외아들인 김대성 전수자가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전수자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김동식 선자장과 부인이 기쁘게 반겨 주었다. 인사를 나누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잠시 후 부인이 설탕뿌린 토마토를 내왔다. 선자장이 자리에 앉자 거실에 놓여 있는 부채들 중 유난히 큰 부채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저렇게 큰 부채는 혹시 임금이 쓰던 것이었나요?”

▲ 임금님이 지녔던 50살 부채를 들고 설명을 하고 있는 김동식 선자장.

대뜸 질문을 던지자 장인은 큰 부채를 바라보며 웃으면서 말한다.
. 맞습니다. 말씀하신 저 부채는 조선시대 임금이 쓰던 50살부채로 100접선 합죽선입니다. 옛 문헌에 나온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 봤습니다.”

김 선자장이 대답과 동시에 합죽선을 들어 활짝 폈다
. 그러자 두 배로 커진 부채가 마치 공작의 날개처럼 멋지게 보였다. 장인이 만든 임금님 부채는 다른 부채보다 크기도 컸지만 활짝 폈을 때 남다른 격이 느껴졌다. 갑자기 선자장이 만든 부채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재료부터 만드는 과정 등 합죽선에 대한 호기심이 요동쳤다.

서둘러 장인에게 합죽선 설명을 부탁했다
.

중국의 부채가 대나무 속살로 만든다면 우리의 합죽선은 대나무 껍질만 사용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 영구적이고 습과 온도에 강해 변형이 거의 없습니다.”

장인은 합죽선에 대한 얘기가 시작되자 봇물터지듯 술술 말을 이어나갔다
.

옛날에 부채는 신분을 상징하는 도구였어요. 특히 합죽선은 양반들만 소유했고 여자용은 크기가 작았지요. 합죽선의 손잡이에 다는 선추는 길이에 따라 신분의 높고 낮음을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부채만 봐도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알 수가 있었어요.”

사대부들은
4080접선 합죽선을 사용했다. 그리고 궁중에서 사용한 윤선이란 부채는 합죽선을 위아래로 연결시켜 원의 형태를 만든 것이다. 사극에서 나오는 크고 둥근 부채가 바로 윤선인데 신하들이 임금의 햇빛가리개 용으로 들고 다닌 것이다.

또 기생들이 사용했던 화려한 부채는 대부분 3060접선의 작은 크기였다고 한다.

합죽선은 순천
, 구례, 하동, 함양, 담양, 진주 등에서 나오는 질 좋은 대나무껍질로 살과 손잡이를 만들고 여기에 전주한지를 붙여 완성한다. 이때 대나무는 3년 된 왕대가 제일 좋다. 손잡이의 재료는 상아, 먹감나무, 흑단, 대추나무 등을 사용한다.

합죽선을 하나를 만드는데
140~150번의 손질이 가야 완성된다. 그래서 대량생산이 힘들고 한사람이 만들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보통 작업에는 6명이 한 조가 되어 26방이라 했다. 즉 골선부와 수장부로 나눠 작업을 한 것이다.

골선부에서는 부채살을 깎아 부채모양을 만들었고 수장부는 인두로 모양을 내는 낙죽방과 광을 내는 광방
, 살에 한지를 붙이는 도배방 그리고 나무못으로 고정시키는 사북이 있었다.

김동식 선자장은 언제부터 부채를 배우기 시작했을까
?

“14
세 때부터 외할아버지한테 배웠어요. 외조부이신 제2대 라학천 선생은 당시 고종 황제께 합죽선을 진상 할 만큼 뛰어난 합죽선 명인으로 유명해서 집안이 잘 살았어요. 저희 집은 먹고살기 힘든 때라 당시 잘사는 외할아버지댁에서 부채 일을 거들었는데 하루는 외삼촌이 저한테 손재주가 있다면서 본격적으로 배워보라고 하셨어요.”

김 선자장은 조선 최고의 선자장인 외조부에 이어 제
3대 라이선, 라태순 그리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라태용 선생 등 세명의 외삼촌으로부터 전반적인 합죽선 제작 가법을 전수받았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합죽선은 선자장에게 평생의 일로 이어졌다. 그는 입대 후에도 휴가를 나오면 합죽선을 만들면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제대 후 독립한 장인은 생계를 위해 채소장사를 하면서 틈틈이 합죽선을 제작했다. 그러다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벌어놓은 재산을 한 순간에 날리고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김 선자장은 다시 일어섰다. 여기에는 주위의 도움도 있었지만 평생을 익힌 합죽선이 큰 힘을 줬다.

그는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합죽선을 만들었고 판매량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 성실함과 실력이 그의 무기였다.

장인은 보통 새벽부터 작업을 시작해서 저녁 늦게까지 하는데 화장실 갈 때와 밥먹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일어서는 일이 없다고 한다
. 건강에 무리는 없냐는 걱정에 그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유지하는 것 같다면서 그래도 장시간 앉아서 작업한 탓에 관절염이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옆에서 김 선자장의 유일한 전수자인 김대성 씨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장인의 말에 덧붙인다
.

최근에 아버지께서 중요무형문화재 심사를 받으면서 더욱 일을 많이 하셨어요. 주문받은 것도 하시면서 심사준비를 하느라 정말 힘드셨는데 잘 쉬시지도 못하고 걱정이 됩니다.”

아들의 걱정에 장인은 못들은 척 딴 곳을 바라보더니 작업하는 것을 보여주겠다면서 일어선다
.
김동식 선자장을 따라 일어나서 작업실로 사용하는
5평 남짓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

▲ 작업실에서 선자장 김동식 선생이 직접 합죽선을 제작하는 과정을 시연했다. /사진: 정대일 작가


작업실에는 앉을 자리없이 대나무와 작업 도구 그리고 작업 중인 크고 작은 부채들로 넘쳐났다.

아버지는 대를 만드는 대나무도 몇 년 전부터 좋은 재료를 위해 마련해 두십니다전수자가 작업을 준비하는 아버지 대신 말했다.
먼저 손수 만든 작업대 앞에 앉아 장인은 비비와 송곳 그리고 활대를 하나씩 보여주면서
이렇게 합죽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전통 방법 그대로 수작업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그런데 합죽선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많고 중국산 값싼 부채들 때문에 제값을 받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한다. 50살 합죽선을 제작하는데 보통 5일이 소요되고 40살도 2~3일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 꼬박 일하는 값만쳐도 최소 50만원은 받아야 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품 부채를 추구하는 김 선자장은 이렇게 만든 부채에 손잡이 재료로 벼락 맞은 대추나무
, 상아, 민어 부레로 만든 풀 등을 쓴다. 하나 밖에 없는 명품 부채를 지향하다보니 손잡이를 금이나 상아로 할 경우 재료값만 100만 원을 훌쩍 넘기는 부채가 탄생하기도 한다.

수량보다 고품질을 지향하는 장인은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만들어서 돈 되겠냐라는 말도 들었지만 자존심으로 고급화를 추구하며 좋은 작품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


주로 선물용으로 주문 제작하는 그는 받은 사람이 호평을 하며 문자를 보낼 때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에어컨과 선풍기 등 문명의 이기로 말미암아 부채는 점점 외면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 김 선자장에게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전통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갈수록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는 전통은 젊은 층의 관심이 없어 사라질 위기인데 자식 외에는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다공정 전체가 아닌 부분별로라도 전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부채를 알리기 위해 완성품이 아닌 시연 위주로 선보이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인이 된 부채 장인의 존재와 업적을 정리해 후세에 남기는 일을 과제로 삼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최초로 선자장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그는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다
.

문화재로 지정만 해놓고 관리를 안해요. 지자체에서도 중앙정부에서도 장인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현실에서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생계가 막연해지는데 이 부분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이죠. 평생을 바쳐 전통을 계승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계걱정은 덜어줘야 하는 게 맞잖아요.”

그는 정부로부터 지정된 장인들이 작업에 몰두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고 강조한다
.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하나 둘 돈 되는 일을 찾아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된다. 결국엔 우리의 소중한 전통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한번 사라진 전통문화는 복원이 불가능하다. 특히 수대에 걸쳐 이어져 온 장인들의 노하우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대가 끊어지면 되살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김 선자장은 또 가장 한국적인 것인 세계적인 것이라는 정부의 홍보처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 외국 귀빈들에게 우리의 전통상품을 선물하면 얼마나 의미가 있겠냐고 지적한다. 그는 합죽선 역시 그 맥락에서 지원되고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초압깎기를 하면서 선자장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불안정한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도 보존돼야 할 전통이 사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힘줘 말한다
.

인터뷰를 마치고 그가 완성된 합죽선을 보여주면서 손잡이 위에 대나무 살이 있는 지목대의 변죽이 탄력이 있고 살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어야 좋은 것이다고 알려줬다
.

▲ 김동식 선자장이 제작한 다양한 합죽선을 펴놓고 포즈를 취했다./사진: 정대일 작가


합죽선 만드는 과정

합죽선은 부채살의 수에 따라 5살 간격으로 10살 부채에서 50살 부채까지 종류가 다양하지만 30, 35, 40살 부채의 제작이 주가 된다. 예전의 부채 만드는 일은 작업의 과정에 따라 전문성을 가진 골선방, 낙죽방, 광방, 사북방, 도배방, 그림방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정련된 대나무를 가지고 부채를 만드는 작업의 전문적 분업과정은 다음과 같다.

 

골선방
정련 공정을 거친 대나무는 겉대작업을 하는데 대의 속을 칼로 도려내면 부채살이 되는 겉대가 된다. 불린 대나무를 '방목'이라 불리는 나무 도마에 올려놓고 여러 종류의 칼로써 대 속을 깎아낸다. 이 작업을 부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만큼 작업의 정교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40
살 짜리 부채의 경우 양쪽 끝의 마디가 촘촘하고 두께가 두터운 두 변죽을 제외하고 38개의 살대를 76개의 겉대로 만든다. 즉 두 개의 겉대를 붙여 하나의 살대를 만드는데, 하나를 장살(또는 장시) 다른 하나를 도막살(내시)이라 한다. 도막살은 장살의 반정도의 길이만큼 잘라서 붙인다. 도막살 쪽은 후에 한지를 붙이는 곳으로 장살 겉대의 속을 파낸 부분은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대를 붙이는 재료는 현재 아교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지만 전통적인 재료는 민어 부레나 민어 뼈를 삶아 만든 풀을 썼다고 한다. 풀칠한 살대 서른여덟 개는 함께 묶어 하루 동안 방안에서 말린다

변죽용 대의 손잡이 부분은 손잡이 길이만큼 대를 깎아내고
'수취목' 이라는 참나무 깎은 것을 붙인다. 이는 참나무를 시궁창에 담궈 묵힌 것으로 그 색이 검다. 그리고 이 수취목에 원래는 소다리 뼈 깎은 것을 붙였으나, 요즘은 플라스틱 제품을 쓴다 


낙죽방

변죽과 살대에 인두로 무늬를 새기는데 이를 '낙죽'이라 칭한다. 무늬의 대상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박쥐, 매화, 국화가 된다.

광방
낙죽 작업을 마친 살대를 매끄럽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먼저 곱지 않은 부분을 칼로 깎아내고 거친 부분은 끌과 '뻬빠(샌드 페이퍼)'로 닦아서 반질반질하게 광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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